brunch

‘가왕’ 조용필에게 배우는 커리어 지속성의 기술

‘한 시대의 가수’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가수’가 된 비결

by 시럽보다달콤

지속 가능한 커리어의 아이콘 ‘조용필’



2025년 추석 밤, TV에서 방영된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공연은 추억 소환을 넘어, 그의 음악이 당대 얼마나 혁신적이고 세련된 사운드였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올해로 음악 인생 57주년을 맞은 조용필은 게스트도 없이 혼자서 밴드를 이끌며 150분간 28곡을 선보였다. 히트곡이 꼬리를 물었고 순간 최고 시청률은 18.2%까지 치솟았으며 방송 이후 곳곳에선 명불허전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시대를 타지 않는 멜로디 라인과 탄탄한 코드 진행은 전혀 촌스럽지 않았고 일흔다섯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흐트러짐도 없는 그의 무대 장악력은 압권이었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사운드로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을 재해석하며, 세대와 시대를 잇는 거대한 다리가 되었다. 제목은 몰라도 모두가 아는 노래, 그 선율에 깃든 각자의 서사가 한데 모여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잊지 못할 음악적 순간을 영원히 아로새겼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곡, 세대를 잇는 감각, 2시간 반을 순식간에 지나가게 만드는 젊은 에너지까지 우리는 느꼈다. 57년 동안 정상에서 활동한 가수는 거의 없다. 시대가 변하고, 산업이 흔들리고, 기술이 바뀌어도 끝까지 ‘현역’으로 남는다는 것은 커리어의 영역에서 기적에 가깝다.


조용필은 어떻게 ‘한 시대의 가수’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가수’가 되었을까?



예상치 못한 직무전환, 새로운 길이 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밴드를 시작했고, 음악감상실과 나이트클럽에서 기타를 치던 조용필에게 알고 있던 한 무명 밴드가 연락을 했다. 기타리스트가 사고가 났으니 1주일만 그 자리를 맡아 달라는 얘기였다. 1971년 봄,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던 친구가 보컬을 담당했는데 입대영장이 나왔고, 그 자리를 메울 멤버는 없었으며, 밖에서 보컬을 구해 오자니 입맛대로 구하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조용필이 맡게 된 거다.


연주와 노래를 병행한 연습 겸 무대활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연습량은 엄청났다. 밤에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음악살롱 연주 때까지 갖가지 음악을 들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을 악보에 옮겨 적는 일 채보를 했다.


광주 미8군클럽 연주생활을 하던 조용필은 1971년 현재 타악기 연주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대환, 나중에 그룹 ‘사랑과 평화’로 이름을 얻은 최이철과 함께 유명한 ‘김트리오’를 결성하고 부산에서 활동하게 된다.



직무전환의 성공 요소는 명확한 목표 설정, 꾸준한 역량 개발, 기존 경험의 활용,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다. 다시 말해, 현재 직무의 불만족 요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새로운 직무에 대한 열정과 적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단기, 중기,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기술과 '소프트 스킬'을 꾸준히 개발해야 한다.


이전 직무에서 쌓은 경험과 역량을 새로운 직무에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새로운 조직문화와 업무 방식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워드 슐츠’의 사례를 살펴보자. 원래 제록스(Xerox)의 영업사원이었던 그는 스타벅스 매장을 우연히 방문하고 ‘경험의 비즈니스’에 빠져든다. 전혀 다른 산업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고객 관찰력과 비즈니스 감각을 새 영역에 맞게 재해석했고, 결국 스타벅스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의 사례도 흥미있다. 전형적인 금융 커리어를 걷다가 인터넷의 미래를 보고 아마존을 창업했다. 전혀 새로운 산업이었지만, 리스크 분석과 실행력은 오히려 초기 스타트업에서 강점이 되었다.



조용필의 사례를 대입해 보자. 조용필은 의정부 미군기지 밴드에서 리드 기타연주를 하는 동안 어깨 너머로 따라부르기를 지속하며 노래도 제법 할 수 있었다.


소리를 어떻게 ‘따야’하는지, 또 발성은 어떻게 하고 기타 연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혼자 모든 것을 궁리하고 생각하고 해결해 나갔다. 무대에 올라 ‘현실’그리고 ‘현장’과 부닥쳤다. 보컬을 맡아 소리를 질러대다 보니 목소리가 눈꼽만큼씩 트이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음역도 넓어져 갔다.


문학수업으로 치면 ‘습작’의 연속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노래와 연주도 곧 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악살롱과 클럽 연주로 압축되는 조용필의 ‘습작’기간은 1969년 처음 그룹사운드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 12년이란 이어졌다. 무대 위에서 열창하고 연주하고, 연습하는 동안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전문가의 가치를 알아보고 제대로 대하다.



수십 년이나 지난 조용필의 노래가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형 라이브 공연에서 촌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이유가 바로, 위대한 탄생 밴드가 극강의 사운드로 노래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수십년이 지난 노래들임에도 요즘 최신 곡 못지 않은 악기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아주 미세하게 매년, 매 공연마다 편곡 작업이 새로 진행되고, 그게 수십 년 동안 축적되다 보니, 시간이 흘러도 당대의 신곡들과 동등한 세련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위대한 탄생’은 1979년에 처음 결성되어 지금도 조용필과 함께 활동하는 조용필의 콘서트 밴드다. 멤버 하나하나가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연주자이며, 각자의 연주 실력과 경륜이 대한민국 최정상이다.


기타리스트 출신이었던 조용필은 일찌감치 밴드와 사운드의 중요성을 깨닫고, 1980년대 전성기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막대한 돈을 꾸준히 자신의 밴드와 멤버들에게 투자했다. 최고의 멤버들을 불러 모아서, 악기, 연주 장비, 무대 장치 등을 모두 최고 수준으로 구비해 주었다.


밴드 멤버들에 대한 수당과 처우 역시 국내 최고다. '위대한 탄생' 멤버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실력면에서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와, 최고의 처우를 받는다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초대형 라이브 공연에서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비결도 오랜 시간 동안 밴드에 막대한 금액과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조너선 아이브’를 붙잡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애플이 위기에 빠져 있던 시절, 조너선 아이브는 회사를 떠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잡스는 그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애플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당신과 일하고 싶어서입니다.”


그 이후 애플은 아이브에게 디자인 전권, 최고 경영회의 직접 참석, 수천억 원대 보상 패키지를 제공했고 그 결과 아이폰·아이패드·맥북 디자인 혁명의 시대가 열린다.


패션 브랜드 샤넬이 ‘카를 라거펠트’를 대우한 사례도 흥미롭다. 샤넬은 당시 위기에 빠져 있던 브랜드를 구하기 위해 라거펠트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넘겼다. 광고, 쇼, 라인업, 콜라보레이션까지 그야말로 ‘브랜드의 운명’을 통째로 맡겼다. 그 결과 샤넬은 부활했고, 라거펠트는 패션계의 전설이 되었다.



조용필의 음악적 발전에 대한 욕심과 집념은 데뷔초부터 꾸준했는데 에피소드가 있다.

조용필이 1집, 2집, 3집 앨범이 연달아 빅 히트를 하면서 조용필은 큰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전세 집에 살고 있었고, 이를 의아하게 여긴 조용필의 아버지가 본인을 인터뷰 하러 온 한 기자에게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자기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 것 같다. 기자가 좀 알아봐 달라."라고 했다.


이에 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은 100을 벌었다 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 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무대에 설 때마다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



트렌드를 흡수하며 끊임없이 내재화하다.



"시아(호주 가수) 같은 요즘 가수 음악을 듣고 안에 있는 코드와 멜로디를 전부 적어가며 연주해요.”

2018년 4월 기자간담회에서 조용필이 한 말이다.


1968년 데뷔한 조용필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음악적 혁신을 이어왔다. 2013년 발표한 19집 '헬로'는 신세대 음악 문법을 적극 차용하면서 온·오프라인 차트를 모두 석권했다. 트렌디한 팝 록으로 "나의 흔적을 타투처럼 새길게(Hello)"라고 노래했다. 'Bounce'는 그해 최고의 히트곡으로, 2014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상까지 수상했다.


"재미없기로 소문났었던 내가 썰렁한 말에 실없이 웃고 많이 들뜨네." ('찰나' 중)


2022년 11월에는 싱글 앨범을 발표했다. 조용필의 음악적 뿌리인 록의 기조를 지켰지만, 2010년대 이후의 ‘젊은 음악’ 트렌드를 좇았다. 작곡을 마틴 한센, 다니엘 무칼라 등의 해외 작곡가들에게 맡겼고, 작사는 작사가 김이나가 맡았다. 김이나의 가사는 칠순을 넘긴 조용필에게 '다가온 사랑에 설레하는 남자'의 모습을 이끌어냈다. 김이나 작사가는 '이 곡의 무대를 보면서 선생님이 아니라 형, 오빠 소리가 터져나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용필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하면서 어떤 장르든 다 해 보고 싶었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동어 반복을 거부하면서 대중의 마음을 관통했고, 과거의 영광으로 박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배우고, 항로를 넓혀 나갔다.



인사관리 역시 마찬가지로 트렌드를 좇아야 한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조직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우수한 인재를 유치 및 유지하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AI 기술의 발전, 새로운 세대의 등장, 일하는 방식의 변화 등 다양한 요인들이 HR의 판도를 바꾸고 있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미래에 필요한 인재 개발 전략을 수립하고 조직의 성장을 준비할 수 있다.


둘째, AI 채용, 유연근무제 등의 최신 HR 트렌드를 반영한 인사 제도는 이러한 인재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이직률을 낮추고 핵심 인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셋째, 직원 경험(EX) 최적화와 같은 트렌드는 구성원의 참여도와 몰입도를 높여 궁극적으로 조직 성과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HR은 기업의 경영 전략과 긴밀히 연결되어 조직의 변화 대응 능력을 높이는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했고,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고 적용함으로써 시장 선도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조용필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신세대 음악을 계속 듣고 연관 음악과 콘서트도 찾아본다. 어떤 아이돌 그룹이 인기 있을 때 그 이유를 찾는다. 젊은 가수의 음악을 듣고 노래가 좋아지면 앨범 전체를 다 들어본다. 어렸을 때는 어땠고 이후 어떻게 변해왔는가, 코드와 화음은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집중해 듣는다. 그의 태도는 동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



자신을 지키며 오래 가는 법, 완급의 미학을 갖추다.


‘25년 프로야구 LG트윈스의 통산 네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염경엽 감독의 성공방정식의 핵심은 완급 조절이다. ‘3연승은 낭비, 적절히 힘뺀 2승1패가 우승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그의 인터뷰 내용이다.


“시즌 초반에 좋은 흐름을 타다 6월에 9승12패로 급격히 흔들렸다. 그때 섣불리 승부를 거는 대신 참고 버티며 힘을 비축한 게 이후 반등으로 이어졌다. 안 좋을 땐 뭐든 해서 흐름을 끊어내고 싶은 게 사령탑의 본능이지만, 잠깐의 부진을 못 견뎌 선수 자원을 낭비하면 정작 달려야 할 시점에 탄력받기 어렵다”


실제로 LG는 6월의 슬럼프를 버텨낸 뒤 7월 14승7패, 8월 18승6패로 반등했다.


그는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조금만 더 힘내면 3연승이 가능한 흐름이어도 적절히 힘을 빼며 2승1패를 유지하는 전략을 취했다. 10연승이 겉보기에는 화려해도 연승 과정에서 과부하가 걸리면 이후 흐름이 더 나빠질 수 있다”


조용필은 선배들의 경험을 보면서 대중들의 인기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TV에 얼굴을 비치면 순식간에 식상해지기에 한없이 ‘인기가 몰아대는 현실’에 쫓겨가는 자신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페이스 조절용 탈출구가 있었는 바, 일본이라는 무대였다. 1980년대 내내 절반은 일본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지냈다. 조용필이 안보인다는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면 돌아와 방송활동을 좀 하고, 질릴 때가 됐다 싶으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매년 계속해서 ‘방송 출연은 이제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대중이 자신을 식상해 할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방송출연에 선을 그어야겠다고, 알아서 비켜나야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고, 오래 가려면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곡과 음반 발표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쏟아내 봐야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었다. 물리적으로 힘들고, 대중은 금방 ‘또 냈대’라면서 외면하게 된다. 그때부터 2년, 아니 3년에 하나쯤 앨범을 발매했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팬들과의 ‘스킨십’을 시작했는데, 바로 라이브 콘서트였다. 80년대 방송으로 대했던 팬들을 90년대에 전부 콘서트로 대면했다고 할 만큼 조용필은 역동적인 라이브 무대를 열어 나갔다.


조직생활은 마라톤이다. 마라톤에 나서려면 달리기 실력과 폐활량을 갖춰야 한다. 또 내리막이든 오르막이든 정해진 길이라면 달려야 한다. 끝까지 달리기 위해서는 페이스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그 모든 것이 갖춰졌을 때 마라톤이든 음악이든 인생이든 ‘롱런’과 ‘승리’가 가능할 것이다.


1970년대 장기간의 습작으로 축적된 조용필의 음악적 에너지는 80년대 그를 가요계의 정상으로 밀어올렸다. 정상의 자리에 내내 머무르던 80년대의 절묘한 자기관리는 팬들로 하여금 조용필이라는 상품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들었다. 자기 절제와 페이스 조절은 가수 조용필의 ‘롱런’으로 이끌었다.



시간을 거슬러 빛나던 청춘의 나를 만나다.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공연에서 카메라는 분주하게 관객들의 표정을 담아냈다. 중장년들의 얼굴은 시종일관 감동과 회한 사이를 오갔고, 감격에 찬 반응은 보는 이의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조용필의 노래는 그들을 가장 빛나던 시절로 데려간 타임머신이었다. 세월에 떠밀려 가장자리로 밀려났지만, 자신의 청춘을 물들인 조용필의 노래, 지금도 건재한 조용필의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


트렌드는 바뀌고 스타는 사라지지만, 가왕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다. 지금 이 질문은 단순한 음악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생애 전체를 걸쳐 ‘현역’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다. 조용필의 롱런은 우연이 아니라 전략이고, 천재성만이 아니라 태도였다. 우리는 그의 음악에서, 그리고 그의 일하는 방식에서 ‘지속 가능한 커리어’의 조건을 읽어낼 수 있다.


“나도 이렇게 오래, 이렇게 단단하게 일할 수 있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합격 통지를 받았는데, 입사가 취소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