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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Dec 23. 2022

불확실한 관계를 수행하는 법

객체지향존재론적 관점으로 고등어 작가의 <신체이미지> 보기

1.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가도 쌉싸름한 여운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원래의 상태를 다시 느끼려고 기억을 꺼내 헤집어도 대부분 유추되는 수준에 머무르거나, 간혹 어딘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고 볼 수 없는 상태에 관하여 의심만 커지는 가운데 사라진 실체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욕구는 커질 따름이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새하얀 바닥과 연필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써 내려갈수록 행간의 틈에서 점점 길을 잃는 것 같다.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온전하지 않은 것이 온전한 체계에 가두어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쩌면 읽을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은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특히 연약한 존재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벌거벗겨진 신체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도 여성의 것에 관해서라면, 심지어는 은밀한 접촉에 관한 것이라면 가속도가 붙는다. 찰나에 조금이라도 솔직하지 못하면 무력하고 불행하지 못한 죄로 외면당하거나, 충실함이 지나쳐서 과한 단어로 설명되면 광기와 히스테릭으로 치부되겠지.


<그림 1> 고등어 <신체이미지_낮풍경>, 2019-21, 연필 드로잉 12점 중 1점, 70 x 56cm,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필자 촬영

위기에 처하느니, 차라리 멀리, 더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있으리라. 희고 검은 도상들을 벗어 둔 채 달아난 것들이 있다.

도식적인 해석은 이들에게 해롭고, 우연은 쓸모없는 명분이다. 온전한 체계에 가둘 수 없다는 전제에 관해 다시금 유념하고 태도를 달리해보자.



2.

찰나의 감정이 객체가 될 수 있을까? 분명하게 목도될 수 있는 무언가를 앞세워 계속해서 물러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롯하게 있기 위해서 자신을 숨겨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어져 왔던’ 서사에 다시금 배태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잠시 형상이라는 베일을 쓴다. 베일을 쓴 채로 잘 펼쳐놓으면, 현시되면서도 해독되지 않을 수 있다. 귀속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단단한 껍질을 얻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새하얀 바탕 위에 꾹꾹 눌러 담겨 희고 검은 도상들로 독립하였으며, 견고한 사각 틀 안에 자리 잡았다.


<그림 2> 고등어 <신체이미지_낮풍경>, 2019-21, 연필 드로잉 12점 중 1점, 70 x 56cm,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필자 촬영


중요한 것은 사건의 전말이 아닌 태도이다. 도상들을 보고 난 후, 이내 도상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들이 나임을 알아차리게 될 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기묘함이다. 비 오고 난 뒤의 풀숲, 뿌연 안개와 보이는 냄새, 불투명한 시야, 스스로의 움직임을 자각한 뒤 안심, 축축한 발자국, 빼곡하게 돌출된 것들, 위태롭게 매달린 성숙, 사이의 절단된 신체 등. 뒤엉킨 심상들이 나를 향해 몰려들어 온다.

오랫동안 고여있던 서사를 위해 자신을 감추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니다. 도상들을 앞세워 달아난 감정을 진솔하게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감싸 안고 또 하나의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기묘함으로부터 시작된 연대는, 단순한 마주침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를 향한 내적인 알아차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바깥의 서사와 나란히 공존하면서, 이미 알려진 다른 이야기와 뒤섞이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된다.



3.

쉽게 무너지지 않을 관계의 울타리를 형성했기 때문에, 적어도 ‘범주’라고 여겨지는 것에 잡아먹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유추에 그치지 않을 자신은 없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관계에서 오는 불확실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상들이 나를 가리킴을 알아차리는 것을 넘어 내가 그 도상들을 수행할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림 3> 고등어, <신체이미지_낮풍경>, 2019-2021, 연필 드로잉 12점 중 1점, 70 x 56cm,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필자 촬영


수행을 전제로 한다면, 이제 이 연약한 존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라진 감정을 대체하여 풀어낸 것은 그 감정을 잠시라도 엿볼 수 있던 때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건 울타리 내에서 관계의 연대에 집중할 수 있었던 순간에 일어났던 일이다. 달아난 것을 뒤쫓는 대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진솔함으로 감싸 안아주면 된다. 나를 사로잡은 기묘한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내가 작은 배에 올라타서 달을 향해 물길을 가로지를 수 있다면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나뭇가지에 매달린 전등보다 밝은 달빛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물길에 뿌리내리지 않은 나무에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봐왔던 거의 모든 종류의 꽃이 총집합해 있다. 나무의 몸통은 매우 단단해 보인다. 그 위에 피어난 온갖 것들은 그 몸통의 두께만큼 무거워 보인다.

이미 다 자라버린 이형의 나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애초에 그렇게 자라나도록 태어난 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은 부유하고 있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과 설 곳을 절박하게 감싸고 있는 뿌리의 태도적 괴리는 존재의 모순을 의미한 것일지도…. 그리고 서로를 맞댄 두 여자의 초상이 있다. 저 나무의 꽃말은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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