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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송아 May 23. 2021

‘열정과 발버둥 사이’  

- 대학원 시절 (인물 취재론 과제)

 

 “이것으로 어반자카파 쇼케이스를 마치겠습니다. 참석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박송아 실장이 행사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수고했어, 박실장 이러다가 전문 MC 되겠어!”, “박실장 님 깜짝 놀랐어요. 이런 재주도 있으시네요.”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이 나고 기자들과 스텝들이 지나가는 박 실장을 향해 한 마디씩 칭찬을 던졌다.

 

 전문 MC가 아니라 홍보대행 업무를 맡고 있는 박송아 실장의 사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간혹 언론 쇼케이스 MC를 봐달라는 요청이 있을 때 대타로 하거나, 큰 비용을 지불하고도 준비한 전문 MC가 마음에 안들 경우 부득이하게 박송아 실장이 무대에 올라 진행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기존의 박송아 실장이 사회를 보던 무대와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80개 매체, 200여 명의 언론 관계자들이 모였으며 보통 언론 쇼케이스의 예산 비용의 10배가 들어가는 큰 무대였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녀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이내 높은 힐을 휘청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아 큰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이 풀어지며 안도하는 표정이었지만 무대에서 꽉 쥔 대본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다. 사실 박송아 실장은 타고난 멀티 플레이어는 아니다. 이번 MC를 보기 위해 며칠 동안 대본이 까맣게 변하도록 공부했고 수십여 차례 연습했으며, 무대에 올라서 긴장하지 않으려 청심환까지 먹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무대를 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작년 겨울 신대방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박송아 실장을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거의 병원에서 살듯 바쁘고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다른 동료들이나 업계 관계자조차 이 사실을 모를 정도로 늘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업무를 진행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밝은 모습은 성장을 하면서 자연스레 본인이 만든 모습이었다. 그녀는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는 집안 대소사뿐만 아니라 사회에서의 리더 모습을 보여줬고 딸에게 책임감과 노력을 강조했다. 장녀인 박송아 실장은 자연스레 아버지를 보고 배웠으며,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악착같이 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그녀의 집안도 아버지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추운 겨울날 군고구마를 사 오신 아버지가 기억나요. 아빠가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셨어요. 제 남동생은 “아빠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어요. 고작 8살짜리 입에서 말이죠. 방 한 칸에서 네 가족은 껴안고 펑펑 울었어요. 그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

박 실장은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아픈 추억이자 성공하겠다는 의지의 원동력이자 집착이었다.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번도 지각, 결석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모습이었던 그녀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3  진로를 바꿨다. 연기를 하겠다고 연극영화과 진학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리자 아버지의 반대는 굉장히 심했다. 타고난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살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처음으로 부모님께 본인의 뜻을 관철시켰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상당한 노력으로 매 학기 동안 주인공을 맡아서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생활은 더 바빠졌다. 방학 때는 무조건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강남, 김포, 수원, 강릉 등 곳곳을 돌아다니며 호텔 예식 서빙, 베이비시터, 의류샵 판매원, 안내데스크, 이미지 컨설턴트 상담사 등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녀는 힘들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스스로 경험을 쌓는 중이라며 위로했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보면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발버둥에 가까울 정도로 몸부림을 치며 치열하게 생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그녀는 또 한 번 큰 결심을 한다. 배우라는 꿈을 접고 돈을 버는 것을 택했다. 대학로에서 한 달에 30만 원으로 생활할 순 없었다. 가족을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는 무조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차이가 있는 거 같아요” 방과 후에는 혼자 취업센터를 찾아가 교육을 받으며 취업 준비를 했다.

 

 그녀의 사회생활 또한 녹록지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홍보업무를 하는 일의 특성상 24시간 대기조 생활을 해야 했으며 기자들과의 관계뿐 만 아니라 일하지 않을 때 만나는 사람들 관계에서도 항상 에너지 넘치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본인의 전문 분야가 아닌 유통, 교육, 뷰티 등 초반에 언급한 MC 같은 일을 맡아서 진행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해결해갔다. 그리고 그럴 때면 처음 해보는 일에서도 실수하지 않고 전문가처럼 보이기 위해 남몰래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노력해야만 했다.

 

  회사 대표는 그녀를 시종일관 박수석으로 부른다. 누가 있든, 어떤 자리든, 그녀를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개하곤 했다. 그녀의 학교 교수였던 강 대표는 “박수석은 말입니다. 맨앞 자리에 앉아 내 침을 맞아가며 4.41로 수석졸업 했어요. 엄청 독했던 친구예요.” 회사대표인 강대표는 사제지간으로 지내다 일찌감치 그녀의 열정을 알아차리고 본인 회사의 직원으로 채용하여 함께 일하고 있다.

 

 박송아 실장은 키는 크지 않지만 깡다구 하나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 하루에 5시간도 채 못 자는 생활을 하면 얼굴에 티가 날 법도 하지만 일을 하면서는 언제나 싱글싱글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대하며, 일을 다 끝내지 않으면 밤을 새우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주말이나 휴일도 따로 없었다.

 

 그녀가 겪어온 숱한 어려운 환경들은 그녀를 이미 여러 차례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에너지로 바꿔서 하나씩 극복해 나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열정을 칭찬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인정 욕구가 있고 성공에 대한 집착과 발버둥이 있다.

 


 욕심쟁이인 그녀는 회사, 가족, 친인척, 친구, 선후배, 학교 등 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항상 바쁘고 발버둥 치며 사는 그녀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하지만  모습이 본인이 한계에 부딪히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해  방법이기도 하였다. 여전히 본인의 생활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스스로를  단계  성장시킬 것인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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