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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Feb 15. 2024

셀프 페인트질의 득과 실

세 식구 알콩달콩쌈싸름 서울 라이프

110만 경기도민이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나는 그런 110만 명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계란 노른자를 둘러싼 흰 자처럼, 그렇게 노른자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편도 출퇴근만 거의 2시간 가까이 걸리는 나에게 (다행히 재택근무도 병행하는 회사다) 서울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편이 박사 공부하는 동안 학교 기숙사에 거주할 수 있게 된 것! 결혼을 한 기혼자를 대상으로 추첨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이 운 좋게 방 하나를 배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두근두근 떨리는 서울 라이프가 시작되었으나 이사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배정받은 집을 정찰(?)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채광 좋고, 나쁘지 않아. 근데 전에 사람이 진짜 더럽게 썼네..."

전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머리 좋은 사람이었겠으나) 집을 너무 함부로, 그리고 더럽게 썼다. 가스레인지 주변에 튄 고추장부터 화장실 불을 키는 스위치 주변에 시커먼 때... 여기서 2년을 살아야 한다고?


남편과 나는 직감적으로 수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다행히 집은 도배가 아닌 페인트 집이어서 온 벽이 다 페인트칠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 영국에서 살았을 때도 페인트집이었는데 더러운 부분이 생기면 그때그때 페인트칠을 해서 깨끗하게 살 수 있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남편) 안 되겠다. 페인트칠 하자."

"(나) 콜"


단순하게 생각하고 실행하는 우리 부부는 즉각 페인트칠에 대해 알아봤다. 일단 학교 측에서는 원래 대체로 방들이 그런 수준이기 때문에 전체 페인트칠은 못해준다고 했다. (다들 이런 벽에 사는 거야..?ㅠㅠ) 남편은 즉각 페인트 시공업체 중심으로 전화를 돌렸고 대략적인 예산을 뽑았다. 15평 아파트 기준 80만 원 (페인트값 제외), 페인트는 대략 3통, 15만 원이 든다고 했다. 총 100만 원가량 투자하면 깨끗한 페인트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겠지만, 외벌이(남편은 공부를... 나는 일을..) 살림에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우리는 셀프 페인트칠을 결심했다. (우리 부부는 가성비 & 몸으로 직접 하는 걸 좋아한다)


득이 더 많을까 실이 더 많을까 반신반의했던 셀프 페인트칠, 득과 실을 정리해 보니 명쾌하다.



먼저, 득!

1)새하얀 페인트칠은 집안 구석구석 묻어있던 손때, 낙서 등의 온갖 더러움을 완벽히 지워주었다.

2) 기존에는 투톤의 촌스러운 벽 색깔(위에는 살짝 누런 아이보리, 밑엔 화이트)이었는데 위아래 모두 아이보리로 칠하니 새집 바이브를 맛보았다.

3) 페인트 3 통과 붓, 마스킹 테이프로 16만 원을 쓰고 인건비를 확 아꼈다. (평수 15평 기준)

4) 남편과 둘이서 페인트 칠을 하면서 새로 살게 된 집에 무한한 애정을 갖게 됐다.

5) 집에 들어올 때마다 새하얀 벽을 보며 페인트칠하기를 잘했다며 자찬하게 된다.


그다음, 실!

1) 페인트칠을 감행하기로 한 당일, 무심결에 입고 간 나의 검은색 운동복이 희생당했다 (옷에 묻은 페인트 바로 세탁하지 않으니 안 지워짐... 굿바이.....)

2) 평일에 일을 마치고 저녁부터 작업을 시작해 새벽 3시까지 페인트칠하는 바람에 2~3일간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셀프인테리어 작업은 반드시 쉬는 날에 하는 걸로....)

3) 마스킹테이프를 발랐지만 아마추어답게 바닥에 페인트가 여기저기 떨어져 닦으라 살짝(?) 고생했다.


그리하여, 결론!

결과적으로 실보다 득이 컸다.

집 평수가 많이 크지 않을 경우(20평 이하) 도전해 보는 것을 제안해보고 싶다. (사서 고생하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 가성비가 중요하신 분들 적극 추천! 혼자 사시는 분들은 친구를 한 명 꼬셔보세요.)

무엇보다 2년간 살게 된 집에 애정을 갖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득이다. 남의 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냥 있던 그대로 살 법도 하지만, (이 집을 살았던 전의 사람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짧게 살더라도 '내가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아껴주자'라는 생각에 페인트칠을 감행했다. 단돈 16만 원으로 2년 동안 집의 현관문을 열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가성비가 아닐까.

물론 인건비를 주고 페인트칠을 맡겼을 수도 있지만, 직접 페인트칠을 하면서 묘하게 힐링되기도 했다. 더러운 삶의 흔적이 새하얀 페인트로 덧입혀지면서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랄까. MBTI에서 대문자 T 성향의 남편이 페인트 칠을 하다가 "우리 마음도 이렇게 깨끗해지면 좋겠다, 그렇지?"라고 말했다. 평소 남편이라면 "수성 페인트는 먼저 초벌로 바르고 마르고 나서 또 덧발라야 잘 발라지는 거야"라는 논리적인 말을 할 텐데. (아마 본인도 모르게 새벽 감성에 젖은 것 같다고 추측한다.)


아무튼 우리 식구는 그렇게 무사히 깨끗해진 마음과 깨끗해진 벽으로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 노른자 라이프는 올해와 내년, 이렇게 2년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 다음 우리 식구의 행보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깨끗해진 새 집에서, 또 새로운 꿈을 꾸어보자고, 더 성장하고, 더 사랑하고, 더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작업 중 야식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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