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주어짐과 수용에 대하여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Theodore Roethke (1908-1963)
영화 '은교'에서 유명해진 이 인용구는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가 한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의 모든 것들은 단지 '주어지는 것'일뿐이지,
우리의 벌이나, 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로스케가 말했듯, 젊음과 늙음 같이 말이다.
심지어 우리의 노력에 의한 성과 또한 우리 노력에 대한 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과는 운이 7할 기세가 3이란 말이다.
노력과는 상관없는 우연에 결과를 기대고 있는 말이다.
기억하기로 학부생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에 비해서 부담 또한 많이 가지는 편이다.
학부생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데 순조로웠다.
하지만 누군가 첫 번째 줄에서 눈을 뒤집으며(?) 졸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30분간 계속되었으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30분간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며 발표를 끝냈다.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그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건 그냥 사고였다. 그냥 우연이고 내가 통제할 수 없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깔끔하게 완전히 망한 그 발표에 대한 성적, 그것은 내가 받은 벌이 아니었다.
가끔은 기분도 그렇다.
가끔 우울할 때도 있고, 그렇게 감정적일 게 아닌데 격정에 찰 때가 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히 이유는 있겠지.
하지만 그게 온전히 나의 잘못에 의한 벌은 아니다.
그냥 가끔은 그럴 때도 있다고 해두자.
상담실에서 보는 내담자분들의 고통 또한 그렇다. 특히 가족의 고통을 겪은 분들은 유독 그것이 심하다.
"저 때문에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걸 그 애한테 허락하면 안 됐어요.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유독 그날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죽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너무 미안해요.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어요."
그것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의 잘못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고다. 있을 수도 있었고, 없었을 수도 있었던 일에 대해 홀로 책임을 지려하지 말라.
어쩌면 그 내담자의 책임의식은 자신이 마음껏 슬퍼하게 하도록 허락하는 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곧 끊을 수 없는 덫이 된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벌을 짊어지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어지는 기분과, 사건, 경험들을 맞으며 살아간다.
이유는 따지고 들자면 필히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나 나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리라.
나에게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이유를 붙이지 말자.
불어오는 바람에 무언가 해석을 달지 않듯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해석을 달지 않을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감정과 생각에 파묻힌 나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