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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o Curly Choi Jul 08. 2024

픽션과 논픽션에 대하여

현실과 비현실 사이

잘 들어봐


내가 잠깐 외출을 한 사이

집에 왕 바퀴벌레가 나온 거야


중3, 초5 아이들은 제주 산 지 벌써 여러 해인데

벌레는, 특히 바퀴는 여전히 극복이 안되었던 거야


꺅~! 아빠 어디야?!!

빨리 와 그냥 지금 와, 꺄악~!

엄지 손가락만 하다니까!

엉엉엉.. 꺼이꺼이..


운전하는 길에 전화가 10번은 더 왔고

내 집중력을 흩트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할 정도로

아이들은 흥분하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쳤지


도대체 그게 뭐라고 이 난리냐며

난 버럭 하기도

차분하게 타이르기도 했어


신발장에 바퀴벌레를 한 방에 즉사시키는

아주 강력한 바퀴 약이 있단다

그 녀석 눈에 보일 때가 낫지

그러다 어딘가에 숨어버리면

우린 오늘밤 잠은 다 잔 거다


난 버럭 하기도

차분하게 타이르기도 했어


그런데도 막무가내

빨리 오라는 말만 주구장창 할 뿐

아이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지

나도 점점 흥분이 고조되고 있었어

왜냐면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집안 어딘가로 숨어드는 건 나도

정말이지 싫었거든


아이들도 걱정되고

이후의 사건 전개가 염려되어

도무지 운전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고

가능한 범위 내 최대한의 속도로

집으로 달려갔던 거야


30여분이 지나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둘째에게서 전화가 왔어

받았더니, 옆집에 사는 이웃 아빠가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뭔 일인가 나왔다가

첫째 딸의 긴급 구조 요청을 받고는

얼결에 우리 집에 와서

바퀴벌레를 잡아줬다는 거야

한마디로 상황종료 됐다는 거지


다행이다 싶었고

그래도 아직 놀란 가슴, 흥분된 심장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로 집에 도착했는데

응?

집도 아이들도 너무 평온한 상태인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나를 보고는

무슨 영화 한 편 보고 난 후 스토리 읊어대는 양

이랬다 저랬다 이야기는 하는데

아까 전화상의 그 긴박함과 흥분은 온데간데없고

그런 일이 있었더랬어 아빠..

그 정도인 거야


이건 뭐지…

정말 왕 바퀴벌레가 나오긴 했던 거야?

난 직접 보지도 못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 한 시간여를 우리 집을 휩쓸고 지나간 건데..

나로선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거야


내가 잠깐 꿈을 꿨나

극도로 흥분한 주체는 아이들이 아니고

나였던 건가


허무하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어디까지 현실이고 비현실인지

가늠이 안 되는 거였어


후…


오늘의 사건은

시간과 공간과

픽션과 논픽션과

현실과 비현실

공감과 무관심이 마구 섞인

역동의 이벤트였던 거지


지금 내 기분이 이해가 될지

응? 내 이야기가 현실감이 없다고?


그래서

픽션과 논픽션 사이.


p.s

겨우 집에 나온 바퀴벌레 한 마리로

이렇게 몸과 마음이 지진 같은 혼란을 겪었는데…

매일 포탄이 떨어져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는

멀리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같은 곳의 일들은

내 일이 아니란 이유로 지금껏 무심하게 대해왔구나.

참 부끄럽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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