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이란 단어가 현재는 울보 찌질이로 통용되지만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많이 한다.
옛날 선조들이 했던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동기부여가 잘 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동기부여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요인은 "감수성"이다.
감정이 쉽게 움직이면 그만큼 자기 목표를 향한 굳건한 의지에 솔직하게 다가설 수 있다.
순수하고 솔직하게 감정에 귀를 기울이면 당연히 동기부여는 잘 된다.
한국은 유독 '순수'를 바보 병신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순수한 영혼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효율적인 체계를 갖추기 쉽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은 결국 순수한 욕망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살을 생각할 때도"살고 싶다"라는 감정을
세상은 혼자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사랑받고 싶다"라는 감정을
전부 끊어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감정을 느낀다.
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모두 순수한 욕망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살을 희망하고 혼자를 추구하고 전부 끊어버리고 싶다고 말해도 결국 우리의 본질은 그 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입에서 나오는 비관에 속기 쉽지만 결국 행복은는 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같이 있을 때 행복하고 보다 더 잘 살고 싶으며 자살하고 싶지 않다.
이 감정에 순수하게 다가간다면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나는 비관주의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비관주의가 사기꾼을 판별하느 데 효과적인 시야임에도 우리가 비관에 빠지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순수함을 유지하는 쪽이 길이 빠르다. 맞는 말을 하는 게 우리 행복과 직결된다.
그리고 이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하며, 감정에 솔직하기 위해선 감수성이 풍부한 쪽이 효율적이다.
근데 참으로 웃긴 점은 보통 이렇게 감정에 충실하라고 말하는 인간일수록 잘 웃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잘 웃고 잘 우는 사람은 이런 진리를 언어화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진리를 몸 안에 담고 있다.
아이들은 자기가 웃는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한다.
본능대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며 니체가 아이를 가장 완벽한 존재로 설명한 이유도 여기 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