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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힐데 Dec 31. 2022

윤창호법 위헌, 그 후의 이야기

법 개정이 먼저일까, 아니면 생각의 변화가 먼저일까?

The Court should never
be influenced by the weather of the day,
but inevitably, it will
be influenced by the climate of the era.
법정은 그날그날의 날씨에 영향을 받기보다
그 시대의 기후에 발맞춰야 한다.
-Paul A. Freund-


오늘 나는 공부를 왜 하는지, 법이 왜 공부하고 싶었는지, 내가 로스쿨에 왜 입학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한 목적과 신념을 잃고 시간을 보낸 뒤 내가 얻은 것에 대해 글을 남기려 한다.


A. 시위도 중요하지만 법이 바뀌지 않으면 문화의 변화는 무의미해요.
B. 생각을 바꾸는게 먼저죠. 생각들이 바뀌어야 법이 바뀌는 거예요.


위 두 문장은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 에 나오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도로시 캐년의 대화이다. A와 B 중 더욱 동의하는 문장이 있는가? 법의 변화와 생각의 변화, 과연 그 중 무엇이 먼저일까. 영화에서 이 대목에 더욱 눈길이 갔던 이유는 윤창호법의 통과와 시행,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이후 지금까지 로스쿨에서 법을 공부하며 내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법이 변화하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사람의 생각이 변화하는 것이 먼저일까

법과 사회가 어떻게 상호작용해 왔는지에 대해 미국의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미국이 '법'이 지니는 '가치'의 변화에 대해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사례를 비교적 다수 갖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선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과 [플레시 대 퍼거슨]사건을 소개한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1954)]
이 판결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미국의 '인종분리'와 '차별'에 대한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인종분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따른 것이었다.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이란, 흑인이었던 호머 플레시가 백인 객실에 탔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법원이 “흑백 분리가 헌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며 “동등한 시설을 제공한다면 인종 분리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사건이다.) 판결 이후 미국 내에서는 기차 뿐 아니라 화장실, 식수대의 수도꼭지, 학교 모두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이 나뉘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은 1951년 8살 딸아이를 가진 아버지였던 올리버 브라운이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며 시작되었다. 집 앞에 학교가 있음에도 그곳이 백인학교라는 이유로 버스를 타고 한참 먼 곳에 있는 학교로 통학을 해야하는 불합리함을 바로잡고자 교육위원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첫 소송에서 캔자스주 법원은 백인학교와 흑인학교가 분리돼 있더라도 시설, 교육과정, 교사 수준 등이 비슷하다면 차별이 아니라며 교육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브라운을 비롯한 같은 처지의 학부모 12명은 항소하였고, 마침내 1954년 연방대법원에서 만장일치로  ‘격리된 교육 시설은 근본적으로 동등할 수 없다’는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학생들을 분리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열등감을 일으킬 수 있고, 흑인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줄여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다.


과거에 미국에서는 인종 및 성별에 따른 차별이 합법이던 시절이 있었다. 흑인과 백인에 대한 차별 및 여성에 대한 차별, 그리고 남성에 대한 차별은 모두 ‘당연함’, ‘관행’, ‘자연스러움’ 등의 말로 포장되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현재의 우리는 인종 및 성별에 따른 차별이 금기시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왜?

라는 질문을 던진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확인했던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용기내어 외쳤기 때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 ‘관행’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에 반기를 든 누군가가 있었던 덕분이다.


창호의 사고 이후 음주운전 처벌 강화에 관한 법안을 개정할 때, 내 머릿 속에 가득했던 생각은 “왜?”였다. 아마 음주운전 처벌강화에 동의했던 당시 국민 모두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음주운전으로 타인을 사망 혹은 중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도 집행유예 판결에 그치는 비율이 90%가 넘는 현실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처벌 수준이 너무 낮아서가 아니다. ‘음주’에 대한 인식이 문제였다. 도대체 왜 음주가 면죄부가 될 수 있는지, 면죄부까지는 아니라해도 음주 사실이 왜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주’에 대한 사회의 관대함. 그것이 나에게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포인트였다.


마침내 윤창호법이 제정되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사회의 변화였다. 식당에 가면 “한 잔은 괜찮아”라고 하던 사람들이 “한 잔도 안돼. 무슨 소리야. 대리 불러.”라고 했다. 누군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던 문화가 ‘요즘 시기가 어느 땐데 음주운전을 해..’ 로 차츰 변화해가는듯 했다.

물론 2022년 5월 26일, 헌법재판소는 윤창호법 중 도로교통법 제148조의2의 1항에 대해 ‘책임과 형벌 간의 비례원칙’ 위반을 이유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는 음주운전과 음주측정 거부를 혼합해 두 차례 이상 하거나, 음주측정 거부를 두 차례 이상 한 자에게 2~5년 징역형이나 1000만~20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조항이다.)

하지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5조의11(위험운전치사상)은 위헌판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사람을 상해에 이르게 한 사람은 1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은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윤창호법의 일부는 헌법에 위반된다는 판결을 받아 실효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사회의 인식은 변화 되었고, 지금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로스쿨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며 나는 ‘법’과 ‘사람’의 관계, 즉 법의 존재 목적에 대한 고민을 하곤 했다. 법학 서적을 읽고 공부하다보니 '법이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사회’와 ‘공동체’, 곧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업 경쟁과 이리저리 치이는 공부량 속에서 나의 고민은 '사치'로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목적을 잃고 방황했던 근본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휴학 후 쉬는 시간 동안에는 철학과 신학 서적을 가까이 했다. 약 8개월간 인문학 및 철학 등 '법학' 외의 공부를 하고 난 후, 지금의 나는 인간적 행위를 지도하는 이성의 명령인 ‘인정법’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배우고자 법학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규제만을 위한 법이 아닌, 평화로운 공동체 유지를 위해 법을 사용하려면 법조인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제일의 관심사다.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던 Paul A. Freund는 이렇게 말했다. "법정은 그날그날의 날씨에 영향을 받기보다 그 시대 기후에 발맞춰야 한다.(The Court should never be influenced by the weather of the day, but inevitably, it will be influenced by the climate of the era.)"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렇다. 결국 '법', 그 중에서도 최상위의 법인 '헌법'은 특정 기간동안 잠시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를 계속해서 통치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아울러 헌법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대 통치받는 이들, 즉 사람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룬드 교수는 그날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 기후에 발맞춘 '법'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법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결국 '법(law)' 보다는 '법정(court)', '단어(word)'가 아니라 '사람(people)'에 더욱 가치를 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은 '법정'에서 활용하는 수단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법'은 틀릴 수 있다. 사실 내가 보기에 '법'은 자주 틀린다. 그래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법'이라는 제도와 규율 자체에 대하여 '왜?'라는 의문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법이란 공동체가 동의한 것이기에 꼭 지켜야 하는 사회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할까.

필자가 법에 대하여 '왜?'라는 의문을 품으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모든 규율에 반기를 들고 따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법이란 특정한 어휘를 가지고 성문화시켜놓은 '그 어떠한 말'이기에, '문장' 그 자체가 아니라 '맥락'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은 일반 시민보다도 이 사회를 살아가는 법조인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단어가 품을 수 있는 뜻의 범위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평등원칙 중 '우리 국민'이 가리키는 범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 '우리 국민(we the people)'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가 마침내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때까지 여성도 포함되지 않아 인구의 절반을 배제한 개념이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은 어떠한가?

과거와 현재, 미국헌법의 해당 부분에 있어서 '법' 자체의 수정은 없었다. 다만 '법정'에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까지 과연 사람의 '생각'변화가 먼저였을까, 아니면 '법'의 변화가 먼저였을까? 그건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각이든 법이든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변화', 그 중에서도 '발전'을 향한 변화는 흘러가지 않는 '시간'의 개념 속에서 필연적인 '기다림'을 요구한다. 진화하는 사회와 함께 성장해야하기 때문이다.


윤창호법 위헌 판결 직후, 나는 판결문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음주운전 금지규정 위반 또는 음주 측정거부 전력을 가중 요건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형의 선고나 유죄의 확정판결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 및 시간적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점, 중한 형벌이 일시적으로 억지력을 발휘할 수는 있으나 결국 이러한 형벌에도 면역이 생겨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 음주운전 예방 교육을 강화하거나 시동잠금장치를 차량에 부착하게 하는 방안을 충분히 대안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위헌 찬성 의견의 골자였다.

한편 반대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발생가능한 모든 경우를 고려해 형벌을 정하는 것은 입법기술상 불가능하므로, 최소한의 구별 기준을 정하고 법정형 범위가 넓어 법관이 개별 사건 사이의 형평을 맞출 수 있다면 비례 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는 점, 불법성과 비난가능성에 상응할 뿐 아니라 시대 상황과 국민적 법감정을 반영한 형사정책에도 부합한다는 점 등을 위헌 반대 의견의 골자로 내세우고 있었다.

결국 시각의 차이에 따라 위헌이 될 수도, 합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법이 변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대해 일정 부분 동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고 싶은 질문이 있다.

법이 변화하고 인식이 변화할 때까지
우리는 과연 얼만큼의 기간을 기다려주었는가?

어떠한 기준에서 법의 변화가 아직은 이르다 말하고,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사람의 생각이 변화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법의 변화와 생각의 변화 중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도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해보인다. '변화'에 있어서는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시도해보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법안의 입안자들은 그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모두가 결국 헌법의 발전에 따라 사회를 올바르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흡하더라도 법안의 개혁을 외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법안' 자체는 자주 틀린다. '완벽'이 아닌 세상을 향한 '기대'를 품은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이 죽어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할 때, 비로소 진정한 '법'과 '법정'의 매력이 살아있는 게 아닐까?


전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So, I celebrate the Constitution as it has evolved over the centuries and not so much with what was written in 1787.
그래서 저는 헌법이 1787년에 쓰여졌다는 사실 보다는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축하합니다.


현대사회의 빠른 변화 속도는 완성도 높은 입법을 기대하기에 점점 더 악조건에 있다고도 보여진다.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충분한 시간동안 고민하고 다른 법안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법안을 내기까지 사회의 변화 속도는 맞춰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재판관들의 역량이 중요한 때가 되어가고 있다.


시대가 변화한다면 법정도 변화해야 한다. 예전 판례들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은 선례들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한다. 법조인들은 그들의 판단 기준이 되는 '법전'에 쓰인 '단어'들이 내포하는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긴밀하고도 예리하게 반응해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도 지금껏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해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자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 1987년 쓰여졌다는 사실 보다는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왔다는 사실에 평생토록 축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생각의 변화와 법의 변화 중 무엇이 먼저인가를 논쟁하기 보다,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시도해보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용기'를 갖춘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2022년, 참 잘 쉬어가는 한 해였다. 내년에도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며 인생을 마음껏 펼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 복 풍년이길!!


여러분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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