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코로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교보문고엔 책을 읽고, 고르는 사람들로 붐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가판대에 누워 있는 책…, 출간된 모든 책이 여기에 진열되는 것도 아닐 텐데 여기에 진열된 책만으로도 엄청나다. 출간하지 않은 글까지 생각하면 글은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서 있어서인지 허리도 아프고 지친다. 눈도 아프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글처럼은 바라지도 않는다. 교보문고 제일 구석에 진열된 책의 글처럼 이라도 쓰고 싶다고 생각하니 글쓰기가 ‘여가’가 아니라 ‘무거운 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글이 차고 넘치는데 나까지 무슨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나 싶은 생각에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문학소녀도 아니었다. 유방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수필가로 등단하고 수필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글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이 쓰는 것이라 생각했고, 난 그런 소수의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는 그들은 나와 다른 종족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방암에 걸리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몸으로 느껴지면서 나를 정리할 말이 필요했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먼저 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할 말들을 남기고 싶기도 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인정을 받고도 싶었다. 아이들에게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는데 병든 나를 보는 일이 참담했다.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부족함이 많았고 그래서 미안했고, 미안하다고도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말들은 글로 술술 나왔다.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나오듯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들은 저절로 나왔다. 발표한 글뿐 아니라 발표하지 않은 여러 글을 썼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글을 쓰기도 했고, 어렸을 때의 기억과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를 생각나는 대로 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렴풋이 내가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글도 썼다. 그러면서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소통하니, 딱히 할 말들이 사라졌다. 이해와 공감의 말이 많아지니 마음에 담아둘 것이 적어진다.
내 안에 담아두는 것들이 적어지니 꼭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더 쓸 말이 없는데 지어내는 문장은 억지스럽다. 마감에 맞춰 써내라는 글은 더 부담스럽다. 그런 글을 쓰면 잘 쓰고 싶은 내 마음이 안쓰럽고, 내가 얼마나 못쓰는지를 알게 되면 실망한다. ‘이렇게밖에 못하니?’ 하는 비난이 올라온다. ‘끝까지 써낼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한다. ‘발표할 정도의 글은 되는 걸까?’ 염려스럽다. 그러면 ‘글을 쓰지 말까?’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래도 글을 써야지’하고 변하기도 한다.
자존감을 높이는 활동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가활동으로 시작한 글이 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 쓰는 시간을 내느라 다른 생활이 방해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글을 쓰며 내가 당면한 것들을 응시하는 작업은 좋지만, 글을 쓰는 것이 목적이 되어 애를 쓰고 싶지는 않다. 돈을 벌어 생활에 보탬이 되는 일도 아니고, 나를 설명할 말을 찾고 싶고, 내가 존재한 시간을 기억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성장하고, 발전하고, 더 잘 살고 싶어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 일기만 쓸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다른 사람의 글과 내 글을 비교하지 말아야겠다. 글 쓰는 것을 숙제나 의무감으로 생각했을 때 글이 억지스러워진 것 같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좋지만 과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글을 쓰며 비워내기보다는 내 안을 먼저 채우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진정한 나를 만나고, 내 안에 이야기가 차고 넘칠 때 체험한 것들이 글로 나올 것이다.
글 쓰는 일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면 좋겠다. 글쓰기 때문에 지치거나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다. 글이 내가 끝까지 가지고 갈 취미활동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여가로 힘을 얻길 바란다. 글 쓰는 일이 나를 즐겁게 하지 않는다면 할 이유가 없다. 글은 내 목적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쓴 글은 내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글이라도 썼노라고 말해줄 것이다. 내가 무엇을 느끼며 살았는지를 보여주겠지, 내가 나로 존재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글과 함께 하고 싶다. 이젠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볍고 서툴더라도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