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경숙 Jun 11. 2020

고집 삼대

견뎌낸 삶에서는 보석같은 빛이 난다.

천성이 누구에게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한다. 어린시절 엄마의 독점적 지배력하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반항했다. 엄마가 잔소리가 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하고싶은대로 했다. 나중에 머리가 크고 나서는 엄마도 나를 못 이겼다. 그렇다고 내가 마구 지르는 성격도 아니다. 앞뒤 재보고 안될 것 같으면 포기도 빨랐다. 어쨌든 뭐든 내가 결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고 웬만한 권위는 인정도 안하고 우습게 알았다. 엄마는 그런 내가 '애비없이 자라서 뽄 때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더 잔소리를 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나처럼 지르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 일견 일리있는 말이기도하다. 스스로 어설프게 선택한 삶이라도 대체적으로 큰 대과없이 살았지만 돌이켜보니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던 순간도 많았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어찌해도 남는 것이기는 하지만.

엄마를 돌보며 '어쩜 이리 나와 똑 같을까?'생각하는 순간이 참으로 많다. 보행이 불편하여 항상 부축하여 움직일 수 밖에 없는데 도와주는 사람을 믿고 전적으로 몸을 맡기지 않으신다. 벽이든 기둥이든 무언가를 꼭 잡고 걸음을 옮기신다. 그런데  문제는 움직이는 곳마다 기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행보조기도 균형을 잘 잡지 않으면 안고 넘어져서 위험하다. 누차에 걸쳐 설명을 해도 매번 움직일 때마다 고집을 부려서 도와주는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한번 잡은 기둥은 놓지 않으려고 어찌나 꽉 쥐는지 두 사람이 달려들어 손가락을 벌려야 겨우 떼어놓을 수 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 엄마는 평생 이런 성격으로 자기자신만을 믿으며 고집스럽게 살아왔다. 청상으로 혼자 살며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동정받지 않고 살아온 비결이 이러한 엄마의 고집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아이들 셋이 거의 할머니손에 컸으니 그 성격형성에도 엄마의  영향이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집은 남편을 제외한 온 식구가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세다. 장시간 토론을 하고 서로 조언을 하지만 결국 나중에 결론을 내린 걸 보면 자기 생각대로 했다. 고지식한 집안이다. 때론 손해도 보고 마음 고생도 하지만 정직하고 자기결정에 책임지는 장점도 있다. 힘든 세월 혼자 힘으로 헤쳐오며 가속을 관리한 엄마의 우산아래 살면서 나와 아이들은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집의 정신적 건강함을 지켜온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토지를 읽으면서 엄마의 모습이 최참판댁을 지켜온 서희의 할머니 윤씨부인의 캐릭터와 겹쳐진다. 최씨 가문처럼 엄청난 부자가 아니어서 관리의 범위는 다르지만 맨주먹으로 후손들 배고프지 않게 재물을 모으고 지켜온 의지를 보면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는 서희가 그 가문을 지키기위해 짊어졌던 만큼의 삶의 무게를 견뎌낼 용기가 있는가? 솔직히 난 지신이 없다. 끊임없이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추구하고 충족하지 못한 현실의 불만을 털어놓는다. 소설 토지에서 서희가 가문을 지키기위해 용정에서 남편 길상을 두고 돌아올 때 나는 서희가 가문보다는 남편 길상과의 행복을 택하길 바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서희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녀는 뼛속까지 최씨 가문을 지켜야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서희가 아들 윤국,환국이 다 자라 품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 절절한 외로움을 느끼는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육체마저도 위축의 과정으로 들어서며 그 무섭고 끈질겼던 집념이 어디로 갔는가' 라고 혼자 되뇌이며 자신의 인생을 '천형의 죄인'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할머님, 그리고 위의 할머님 또 할머님, 그분들이 청상이 아니었던들 오늘날 최참판댁 재물은 없었을 것이다. 베푸는 자는 항상 무자비한 존재요 외로운 사람, 이 집안의 과수들은 끝내 베푸는 자리를 지켰으며 무자비한 군주였더란 말인가. 청상은 베풂을 받아서도 아니 되고 능멸을 받아서도 아니 되느니, 가을마다 곡식 섬의 수를 헤어야  했던 그 가는 손목의 과수들, 어찌 참혹하지 아니할꼬. 천형의 죄인이로다."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부분에선가는 운명의 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거부할래야 할 수 없는 운명. 어쩌면 삶이 아름다운 것은 이 처절한 운명의 길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그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도 의지이자 선택이다. 많은 댓가를 치루면서 타협하지 않고 피투성이로 살아낸 삶에서는 보석같은 빛이 난다. '토지'에서 '서희'의 삶이 그렇다.

그리 거창한 운명론은 아니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내가 선택한 삶이라기 보다 견뎌낸 삶이기에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집스럽게 지켜내는 이 삶이 다 잘 풀리는 것이 아닐지라도 겪어낸 시간만큼은 가치가 있다. 엄마나 내가 살아낸 삶이나 우리 아이들까지 삼대의 고집이 이만큼의 우리가족을 지켜왔고 또 앞으로도 힘들지 모르지만 우리는 잘 지켜갈거라 생각한다. 토지를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로 격리되고 차단된 시간을 견디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