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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Nov 20. 2024

11월

11월, 마음이 급하다. 두툼하던 달력이 다 뜯겨나가고 헐렁하게 두 장만 남았으니. 날씨마저 이 울적한 기분을 부추기듯 쌀쌀하다. 공휴일도 하루 없이 꽉 찬 한 달이다. 그래도 한낮의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눈부시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겐 절망이라지만 은퇴자에게는 오히려 알찬 한 달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주 빈손으로 나 앉지 않도록 한 장의 달력이 더 남아있지 않는가. 


빨갛고 노랗게 다채롭던 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무는 몸체를 드러낸다. 들판을 꽉 채웠던 작물들을 수확하고 나면 빈 논에 짚둥우리만 남으리라. 한 해 동안 힘줄을 드러내며 일하고 땀을 쏟았던 농부들은 결실을 거둔다. 축적하고 안으로 키워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열매이다. 직장을 다닌다면 연말 결산을 위해 마지막 기회를 얻은 달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성과들을 주워 모아 보고서를 꾸리고, 부족한 결과를 만회하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쓸 기회이다. 12월의 두둑한 보너스를 기대하며.


많은 사람이 빼빼로를 들고 다니던 11월 11일, 몇몇 친구들과 색다른 파티를 했다. 일 년을 살면서 고민하고 기획하여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엮은 책을 들고 모인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장롱 속에 모셔두고 아끼던 옷도 꺼내입은 모양새다. 열심히 애쓴 자신을 위해 스스로 선물을 주는 날이다. 세상에 오직 한 권만 존재하는 책을 만든 사람도 있고, 손주에게 남기기 위한 할아버지의 일기를 엮은 이도 있다. 더러는 많은 독자와 공감하려 출판을 하기도 했다. 코로나 전에 시작하여 5년을 계속했으니 제법 책들이 축적되었다.


은퇴를 준비하며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이었다. 백 세를 사는 시대라고 하니 걱정이 없을 수 없다. 육십에 은퇴하여 남은 시간 사십 년을 어찌 보낼지 막막해했다. 이모작을 하겠다고 경력을 활용하여 열심히 뛰어다닌다. 그러나 손도 느리고 뇌의 순발력도 떨어지는 시니어의 취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평생 저축해서 노후를 준비했다 해도, 이제 뭘 하며 즐길지 하는 고민이 길어진다. 그때 이들이 만난 것이 책이다. 책을 읽으며 길을 찾고 함께 토론하다 보니 쓰기까지 이어졌다. 평생 업무보고서만 쓰던 이들이 처음 자신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며 스스로 놀란다.


이들이 11월 11일에 모이는 이유가 있다. 읽고 쓰는 은퇴 생활을 시작하며,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책을 읽고 일 년에 한 권 책을 쓰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랫츠 1111 (Let’s1111)이라는 구호를 정하고 매년 11월 11일 자신이 쓴 책 한 권을 들고 모이기로 했다. 이날은 그야말로 회사로 치면 사업실적보고서를 발표하는 날과 같다. 각자가 쓴 책을 전시대에 진열하고 자기의 책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을 가진다. 멋진 복장으로 최대한 자신의 책을 돋보이도록 소개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파티는 이 모든 긴장을 풀고 제대로 즐기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마무리다. 빼빼로 데이가 아니라 책(册)과 함께 춤추는 날.


일생을 살면서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날들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누구든 살아낸 이야기가 한 보따리다. 보따리 속 이야기를 풀어내기만 하면 책 한 권뿐이랴. 부모님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낸 세월을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모자란다고. 글을 잘 쓰고 못 쓰고가 핵심이 아니다. 자기 안의 이야기를 토해내면서 스스로 정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 애쓰고 땀 흘리며 살았는데 아이들에게 교훈을 이야기하면 잔소리가 된다. 억울하기도 하다. 그럴 때 뒷산에 올라 신령님께 하소연하듯 글을 풀어내면 된다. 어린 시절 일기를 쓰면 늘 마지막은 ‘즐거운 하루였다’로 끝났었다. 엄마에게 혼났어도, 맛있는 과자를 먹지 못했어도 일기는 즐거운 하루로 끝나야 했다. 노년에 쓰는 자기 글도 그렇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괴로움과 슬픔마저도 글이라는 창을 통해서 보면 ‘좋았던 날들’이 되지 않겠는가. 자기만의 인생 정화의 시간이니.


11월은 아직 기회의 달이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인생을 놓고 보면 후반기의 끝자락에 아직 마무리할 시간이 남은 때이다. 이제 흩어진 이삭을 줍고 쌓아서 부족한 수확을 보충할 때다. 그리고 쭉정이를 버리고 알곡들로 곳간을 채워 식구들의 양식을 만드는 달이다. 살아오면서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마지막으로 다시 시도할 기회가 있다. 여기저기 너무 많은 것을 벌려놓았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갈무리할 때이다. 11월,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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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 2화가 곧 발행될 예정입니다. 2024년 11월 27일 수요일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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