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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Jul 06. 2019

여행자의 서재

삶이라는 여행 속 나의 서재


유쾌한 미아동 여행



동행한 동생과 함께 잠시 미아동의 어린 여행자가 되어, 쫄깃한 떡볶이도 즐기고 오래된 문구점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다시 시커먼 어른이 되어 공짜 맥주를 주는 행사에 다녀왔다. ‘여행자의 서재’라. 보통 서재는 빼곡히 무겁고, 여행자는 종잇장처럼 가볍지 않은가.


행사가 열린 곳은 유명 카페였는데, 흥미롭게도 우체국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조금 일찍 입장했고, 담당자들은 준비한 팸플릿을 건네며 친절히 안내를 해주었다.


네모나고 널찍한 공간 깊은 쪽으로 음료를 내어 주는 바가 보였다. 나머지 공간은 ‘쉼’, ‘예술’, ‘마실거리’, 세 가지 취향으로 나뉜 150권의 책들과 차가운 소재의 의자들, 그리고 도심 속 짧은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 취향은 맥주보다는 커피였기 때문에 얼음이 그렁그렁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얻어 자리를 잡았다.


원하는 책을 고르면 입구 쪽에 이름을 적고 빌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커피와 카페를 주제로 한 <Bear>지의 창간호를 골랐고, 동생은 ‘파주 타이포그라피 학교’의 여행 과정을 담은 <BB: 바젤에서 바우하우스까지>라는 제목의 깔끔한 책을 골랐다. 서로 고른 책을 바꾸어 읽기도 하고, 소망하는 여행과 작업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밤까지 마음에 드는 다섯 권의 책을 골라 훑어보았고, 그중 한 시간 동안은 세 강연자가 각자의 여행에서 경험하고 영감을 받아 창작한 것들을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토크쇼 신청에 실패했기 때문에 먼 곳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직원 한 명이 나중에 내용을 정리해 보내주겠다며 이메일도 적어가고 설동주 작가가 준비해 온 팸플릿도 가져다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간은 정말 사려 깊고 알찼다.


사람들은 삶이라는 여행 속에서 저마다의 서재를 취향껏 채워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일상을 환기하거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개운한 장소로 떠났다. 누군가는 도시의 정취를 간직한 공간에서 영감을 받기 위해, 또는 사랑하는 음료를 더욱 풍부하게 맛보기 위해 떠났다. 좋아하는 것으로 일상의 균형을 찾고, 삶을 더 풍요롭게 가꾸는 일이라니. 스스로에게 생긴 몇 가지 질문을 노트에 적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 마음속 서재 들여다보기



다음날 아침, 가벼운 노트와 필기구만 챙겨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따뜻한 만델링 한 잔을 주문하고 적당히 그늘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주 온다는 카페라서, 어디에 앉아 작업을 하곤 했을까 상상하며 커피를 기다렸다.


단정한 흰 잔에 담겨 나온 깊은 빛깔의 커피. 열심히 생각을 꺼내 적다가 고개를 들어 한 모금씩 머금었을 때의, 조금씩 식어가는 온도가 반가웠다.


커피는 참 담백했으나 내가 쓴 글은 그렇지 못했다. 노트에 적어 내려간 것은 지난밤 다른 사람의 서재에서 얻어 온 다섯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실제와 희망이 그럴듯하게 섞여 버려 정말이지 못마땅했다. 아직 애송이라서 자신에 대해 시시콜콜 정의 내리는 것이 몹시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도 번들번들한 대답을 하고 나니, 나의 서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서재의 책장은 분명 검은색으로, 어디서 주워 온 것이거나 좋아 보이는 남의 인테리어를 따라 구입한 미니멀한 제품일 것이다. 아니면 가까운 지인이 어수선한 공간을 보다 못해 대신 주문해준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책장은 총 세 개로,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것 하나와 내 키만큼 크고 넓은 것 하나, 그리고 푹신한 의자 가까이에 달린 선반형이 하나 있다. 아 그리고 의자는 단 두 개뿐이라서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초대할 수 있고, 알아서 잘 자라는 박쥐란 화분이 하나 있다.



하나. 글을 담은 책장


이 책장에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멋진 어린이 문학 전집이었으나, 엄마가 상의 없이 사촌 동생네로 보내버렸고, 사촌 동생네는 곧 다른 사촌 동생의 집으로 전집을 보냈다. 그래서 이 책장에 처음으로 꼽아둔 것은 어두운 시집으로, 고등학생 시절 범생이답게 국어 선생님을 찾아가 보여 드리곤 했던 시들을 엮은 것이다. 그 옆으로는 교양 글쓰기 시간에 들고 다니던 초록색 노트가 한 권 있다. 이 노트의 이름은 <글로 그리기>였는데, 늘 소중하게 보관해왔다.


근래에는 유쾌한 사람들이 쓴 얇은 수필집을 모으고 있다. 스스로 옹졸해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종종 꺼내보며 ‘사회화에 실패한 개처럼 굴지 말자’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내가 직접 써 모은 낱장의 글들로, 일기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흰 개에 대한 글을 자주 꺼내 읽으며, 언젠가 여행을 떠난 개의 이야기를 직접 그린 삽화와 함께 가벼운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하나의 소망이다.



둘. 이미지를 담은 책장


크게 되자는 포부로 가장 큰 책장을 들였으나, 고민이 많았던 만큼 빈 공간도 많다.


4년 동안 눈에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의복과 원단에 관한 책들은 어리석게도 몇 년 전 모두 내다 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섬유 조형 시간에 자유롭게 작업한 것들을 모아 둔 사진첩뿐이다. 이후 잘 맞는 표현 도구를 찾고 싶어 물감, 자수, 실크 스크린 등에 대한 책들을 잔뜩 모아 보았지만, 손이 잘 가지 않아 높은 곳에 올려두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럿 모으게 된 그래픽 툴 관련 자료들만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급한 성미를 가진 나에게 참 잘 맞는 작업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책장 맨 아래에는 소장용 원단들을 모아 놓은 플라스틱 상자들이 있다. 여행을 가서 신중히 골라온 옥빛 자카드 천도 있고, 샘플용 원단을 고르다가 마음을 빼앗겨 용도를 생각지 않고 사버린 고가의 쉬폰 천도 있다. 요즘은 이 고운 천들을 좀 더 실용적으로 소장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셋. 기분 전환을 담은 책장


이 선반형 책장의 삼분의 일은 개 사진첩이다. 나는 틈만 나면 웃기게 생긴 개 사진을 찾아 저장해 두고 가까운 이들에게 공유한다.


나이키 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는 연두색 노트에는 달리기 기록을 메모해두고 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걷기를 좋아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머리를 비우려고 뛰기 시작했다. 얼굴에 땀이 나면 개운하다.


최근에 구입한 새 노트에는 매주 월요일에 방문할 카페 목록을 적어두고 있다. 맨 앞 장에는 선호하는 카페의 조건으로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 일 것', '소규모의 공간일 것', '핸드 드립 메뉴가 있을 것', '다양한 잔과 소서를 즐길 수 있을 것'등을 적어 놓았는데, 두어 시간 혼자 앉아있을 수만 있다면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남은 자리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와 지인들이 화사한 얼굴로 이야기해준 것들을 적어둔 수첩을 두고 종종 읽곤 한다.





서재 가꾸기



내 마음속 서재를 정리하는데 5일이 걸렸다. 생각나는 것만 써오다가 생각해서 쓰려니 어려운 것이다.


나에겐 새털 같이 많은 날들이 있고 저 커다란 책장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매주 하나의 주제를 글로 풀어보기로 했다. 지금은 금요일 밤 열두 시. 스스로 만든 마감을 지켰으니, 아쉽지만 기쁜 마음으로 양치를 하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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