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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Aug 15. 2019

계란볶음밥

세 식구, 또는 우리 모두의 한 끼


“시금치나물? 세상에서 제일 만들기 쉽지.” 종종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레시피를 물어보면, 그녀는 매번 세상에서 제일 만들기 쉬운 것이라고 하며,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정말 쉬운 요리법을 알려준다. 지금은 수 년째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손맛 좋은 주방장이지만, 내가 어렸던 때 엄마가 해 준 요리로는 계란볶음밥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아홉 살 때, 우리 셋은 뉴코아 맨션이라는 작은 빌라에 살았다. 저녁이 되면 빌라 단지의 골목이 어찌나 캄캄했는지, 누르면 소리가 나는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등도 없이 어둡고 서늘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작은 주방이 보였다. 왼쪽에는 옥색 플라스틱 서랍장이 있는 옷방과 화장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미닫이 문이 달린 안방이 있었다. 나는 엄마와 오빠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옷방 구석에 앉아 혼자 놀았다. 한 번은 그들을 기다리다 지쳐 깊이 잠드는 바람에, 엄마가 보조 열쇠를 가지러 외할머니 댁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혼나지는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주욱 함께 살아왔는데도 30대 시절의 엄마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표정도 말투도 목소리도 먼 친척처럼 가물한 것이다. 그래도 그녀의 몇 가지 모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클래식 모음집을 틀고 누워 있는 어느 휴일의 엄마. 그녀는 그렇게 누워있을 때마다 한쪽 팔을 이마 위에 얹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밥때가 되면 어느샌가 일어나 휘리릭 밥을 볶아주었다. 오빠와 나는 밥상에 마주 앉아 노란 계란볶음밥을 프라이팬 채로 신나게 퍼먹었다. 밤이 되면 나는 그녀의 시원한 팔을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오빠와 나는 각자 스무 살이 되던 때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줄 알았던 때다. 지난 9년간의 자취 중 두어 번은 몇 달간 함께 살기도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미소와 동시에 눈물이 난다. 


특히 삼 년 전 봄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나는 편집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오빠는 온 힘을 다해 첫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클럽에서 나올 만한 노래를 틀고 흔들흔들 엉덩이 춤을 추며 방 밖으로 나와 “좋은 아침!”하고 인사했다. 퇴근해 현관문을 열면, 그는 주방에 서서 저녁을 준비하다가 “왔는가!”하고 반겨주었다. 우리는 안방에 좌식 밥상을 펼치고 마주 앉아 허겁지겁 저녁을 먹었다. 이때에도 계란볶음밥을 자주 해 먹었는데, 이상하게도 엄마가 휘리릭 볶아준 것과 묘하게 다른 맛이었다. 기억 속의 계란볶음밥은 고소하고 짭짤하며 포슬 했지만, 내가 만든 것은 왠지 축축하고 싱거웠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강변을 따라 함께 걸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말이 많은 편이어서, 하고 싶은 일과 지나가는 아이디어를 꺼내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불이 환하게 켜진 성산대교가 나왔다. 잠시 계단에 앉아 멍하니 강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와 씻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회가 끝난 후, 우리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치킨을 시켜먹고 매일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었다. 


오빠는 곧 일자리를 얻어 떠났고, 다시 퇴근 후 집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한동안 안 방에 밥상을 펴고 앉아 있는 오빠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눈물이 났다. 오빠와 함께 사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었음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오빠가 떠나기 전 날 밤, 우리는 시원한 안방 바닥에 대자로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킥킥댔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야말로 꿈이라는 머리와 불안이라는 꼬리를 가진 풍선 같은 것들을 마음속에 넘치도록 꾹꾹 눌러 담아두고, 작은 머리로 이리저리 재던 때였다. 며칠 뒤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해주던 것과 똑같은 계란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는 소식이었다. “어떻게 했는데?” “응. 실수로 다시다를 쏟았는데 딱 그 맛이던 걸.”


나는 그 이후에도 거의 매일 밤 혼자 강을 걸었다. 날이 맑아 야경이 보기 좋은 날이면 오빠와 함께 걷던 때가 생각난다.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울 사람은 없어도, 흘러가는 강과 환한 다리는 그대로다. 스스로의 안팎을 들여다보고 힘을 얻거나 힘을 빼고 돌아오면, 빈 집에 돌아와도 혼자가 아닌 기분이다. 


이제 엄마의 주력 메뉴는 닭볶음탕이 되었고, 오빠는 한 도시에 자리를 잡았으며, 익숙하게 무대에 오른다. 그들의 가장 불안정했던 시절에, 가장 가까이에서 어린 눈으로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하던 나도 그 나이가 되었다. 막내의 특권으로 좀 더 응석을 부리고 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계란볶음밥을 어떻게 만드냐고 물어보았다. “볶음밥은 파가 들어가야 맛있어.” “아니 아니, 옛날 버전으로. 우리 어렸을 때 해주던 거.” “응? 그건 뭐 들어간 게 없을 텐데.” 계란 두 개 풀어서 식용유 두른 팬에 부어 익히다가 밥, 깨소금, 참기름, 간장, 다시다 쬐끔씩 넣어 볶기. 돌아오는 일요일 저녁에는 오리지널 버전 계란볶음밥에 도전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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