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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01. 2020

록펠러와 카네기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40

1839년 뉴욕에서 태어난 존 D.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1937)는 1863년 남북전쟁 중에  농산물 중개 상점에 근무하다 곧 자신의 중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사업적 기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1859년 펜실베니아에서 석유 유전이 발견됐다. 그는 곧바로 석유사업에 눈을 돌렸다.


스탠더드 오일의 존 D. 록펠러


록펠러는 초창기 석유를 시추하는 일보다 석유의 사용과 용도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석유를 정유하고 운송하는 분야가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1863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세운 그는 이후 더 많은 자본을 끌어모아 본격적인 확장을 진행했다.



존 D.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석유 사업의 핵심은 이동 비용을 얼마만큼 절감하느냐에 따라 그 이익의 규모가 달라진다는 것을 파악하고, 철도를 통한 물류비용의 효율화에 앞장섰다.


1870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Inc)’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종 업계의 회사를 하나둘 인수 합병하면서 덩치를 키워나갔다. ‘클리블랜드의 대학살(The Cleveland Massacre)’이라 불리는 사건은 187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경쟁 정유사 26개사 중 22개를 인수, 합병한 것이다.


석유 업계의 트러스트


이 사건 이후 규모의 경제를 내세워 막대한 자본력으로 독점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막대한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트러스트(trust, 독점 대기업)’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독점적 공급을 위한 여러 개의 회사가 담합한 카르텔은 기존에도 있었으나 하나의 회사가 모든 것을 독점하겠다는 트러스트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트러스트 묘사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는 석유 운송비를 올리기 위한 철도 회사끼리의 담합에 격분, 석유 운송 파이프라인을 만들었다.


그가 가진 막대한 자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철도 회사는 담합을 접고 운송비 저가 경쟁에 나서게 되지만 가장 큰 고객을 잃은 후라 매출과 이익에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석유 전체의 95%를 공급하였다. 대신 품질의 유지는 물론 공급가는 기존 가격 대비 80% 인하된 가격으로 제공하였다. 저렴한 석유의 공급으로 관련된 산업의 발전은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록펠러와 그의 아들 록펠러 주니어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는 1887년까지 회사 운영을 담당했다.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 주고 은퇴 했지만, 최대주주로 남아 있었다.  은퇴 후 40년간 자선사업에 나섰다. 의학, 교육 및 과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1년 대법원은 '연방 독점 금지법'을 위반한 스탠더드 오일에 대해 해체 명령을 내렸다.



 카네기 철강회사의 앤드루 카네기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1835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태어났다.


1848년 그의 가족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일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업종에 투자하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된 그는 1872년 ‘홈스테드 제강소’를 설립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출처 : 위키피디아>


1892년에는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인 ‘카네기 철강회사(Carnegie Steel Company)’를 설립했다.

당시 미국 철강 생산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1901년에 4억 8000만 달러를 받고 사업을 통째로 J.P. 모건 은행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주회사에 넘겼다.


새로운 철강회사 ‘US스틸(U.S. Steel)’은 출범 당시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자본금 14억 달러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자본금 규모가 10억 달러를 넘긴 최초의 회사였다. 연방정부의 1년 예산이 5억 2500만 달러였는데 이보다 2.7배나 컸다.



카네기 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지역 도서관, 교육 및 과학 연구 지원에 중점을 두면서 남은 생애를 대규모 자선 활동에 몰두했다.


뉴욕의 카네기 홀을 비롯, 카네기 연구소, 카네기 기금, 피츠버그 카네기 박물관 등 그의 흔적은 많은 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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