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ka Oct 21. 2021

어느 가을, 정선의 오래된 레일바이크를 타고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본 그곳에



드디어 뚜벅이 신세 탈출!


"우리 이번 연휴에 강원도 1박 2일로 갔다올까?"

"좋지~ 나 정선 가보고싶었어. 정선 레일바이크!"


우리는 서른이 넘도록 뚜벅이였다. 작년부터 조금씩 운전을 배운 남편 덕에 이번 가을 처음으로 뚜벅이 신세에서 벗어나 차를 몰고 여행을 가보기로 했다.


워낙 다녀보질 않아서 어딜 가서 뭘 봐야할지 도통 감이 없었는데 문득 정선 레일바이크가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 모닝와이드이던가 생생정보통이던가, 아무튼 그런 공중파 TV 프로그램, 어르신들이 즐겨보시는 프로그램에 나온 걸 본 적이 있었다. 아마 2000년 초에 한참 인기를 끌었던 관광명소였던 것 같다.


이미 유행은 한참 지난 것 같지만,


십년 전 쯤에는 예약조차 어렵다고 했었는데 이젠 관광지가 워낙 많아져서인지 널널하게 예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목적지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같은 레일바이크의 탑승장, 강원도 정선의 구절리역이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 산들을 마주하며 달리고 있자니 "아, 우리나라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는 감상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앗 초점이 나가버렸네


11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구절리역은 평화 그 자체였다. 승강장 앞 작은 식당에서 곤드레 메밀전, 곤드레 김밥, 그리고 탱수추어탕을 먹는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메뉴들인데 정갈한 밑반찬과 부드러운 곤드레가 너무 맛있어 허겁지겁 허기를 채운다.


사진에 생명체가 총 몇마리일까요?


식당 위층에 있는 카페에서 레일바이크 탑승시간을 기다린다. 브라우니에 커피 두 잔을 시켜 야외에 자리를 잡는다. "이야~ 날씨 좋~다, 풍경 끝~내준다!" 하자마자 벌이 접근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벌은 처음봤는데,

찾아보니 장수말벌이었다. 아마 브라우니 위에 올라간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향기때문일 것이다. 우리 둘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에서 멀어진 뒤, 잔뜩 움츠러들어 눈알만 굴린다. 실내로 대피(?)할 요량으로 벌이 잠시 멀어졌을 때 나는 커피잔을 양손에, 남편은 브라우니가 든 쟁반을 냉큼 집어들었는데 그 사이 그 녀석이 다시 날아든다.


제발..!


브라우니 위를 -, 쟁반 밑을 - 순찰하더니 마지막엔 남편의 왼손 위를 - 걸어다닌다. 벌이 다시 멀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시간이 멈춘듯 돌처럼  자리에 굳어버린다.  녀석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사히 실내로 도망쳐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남편은 여전히 고통에 질려서는 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소름끼치는 감촉에 대해 호소한다. 다른 고통으로 잊자! 하며 찰싹 찰싹 때려준다. 벌 때문인지 내 매운 손맛 때문인지 남편의 손은 불그스레 변하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레일바이크 탑승장으로 향한다.


첫차도 막차도 아닌 애매한 차를 타야해


레일바이크에서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던 우리는 줄줄이 오는 뒷차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1등 차는 피하기로 한다. 맨 뒷차를 타기엔 우리가 앞서 보낸 대기시간이 너무 길었다. 결국 애매한 순서에 있는 바이크를 타기로한다.



우르르 몰린 탑승자들 사이에서 눈치게임에 성공해 네 번째 열차에 탑승했다. 얼마 안 가 사진기사님이 부푼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 우리를 찍어주신다. 종점에 도착하면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설렘도 잠시, 맨 앞차가 그다지 빨리 달리지 않는다. 어느정도 가면 빨리 달리겠지, 블로그에서 본 사진처럼 너른 풍경에 우리만 있는 멋진 씬이 펼쳐지겠지, 하고 인내하며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앞에 달리는 줄줄이 소세지의 뒷통수만 보고 달린다.



달리다보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식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터널도 지난다.


어흑 움직이는 중에 수평을 잡는 건 너무 힘들다


'아, 너무 예쁘다'를 연발하다보면 어느새 도착! 대부분 내리막길 구간이어서 힘들게 페달을 밟을 일은 별로 없다.


기념사진 같은 걸 누가 사?


내리는 곳에 도착하면 출발 직후 찍었던 사진을 구매할 수 있다. 여기서 정말 신기한 것을 발견한다. 세상에 하고 많은 관광지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여행객들에게 구매를 유도한다. 보통은 그 사진들을 모니터로 보여주고 구매를 확정하면 제품으로 만들어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판매가 확정시되지 않았음에도 사진을 전부다 인쇄하여 유리앨범에 넣은 채 진열해둔다. 주르륵 세워져있는 액자를 보며 남편과 나는, "도대체 이 많은 게 팔릴지 안팔릴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해둔거지?" 라는 말이 끝날 즈음 우리의 사진을 발견한다.


아닛, 이럴수가! 생각보다 사진이 너무 잘 나왔는데?


"이거 우리 하나 살까?" 하는 도중, 진열대를 둘러보니 이미 유리액자의 절반 이상이 팔려나가고 없다. 계산을 마치고 뒤돌아설 땐 남은 액자가 정말 얼마 남지않았다. 관광지에서 찍어주는 사진이 이렇게 잘 팔리는 건 정말 처음보는, 신기한 광경이다.


그치만 이해가 간다. 이미 우리집 선반에도 저 유리액자가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새롭지 않아도 늘 찾게되는 단골가게처럼

오래된 관광지임을 보여주는 건지, 젊은층은 별로 없었다. 주로 어르신들이나 가족단위가 많았다.


그치만 좋았다. 매년 꼭 한 번은 방문한다는 '단골'들이 많은 이유가 이해가 됐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선 레일바이크는 어쩌면 새롭고 짜릿하고 힙한 맛집보다는, 편하고 익숙하지만 늘 좋은 단골가게로 자리잡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내년에 다시 한 번, 레일바이크를 타러 오게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4월 둘째주의 경주, 둘째날 반과 셋째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