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한 군데가 순천만 습지였다. 전날 순천만 정원을 돌아보았지만 한국정원이 있는 외곽 부분을 다 돌아보지 못했고, 스카이큐브라는 순천만 정원~순천만 습지를 연결하는 이동수단을 타보지 못해서 결국 패키지 입장권으로 다시 끊었다.
순천만정원이 열자마자 주차를 하고, 매표를 하려는데 저 멀리서 고속버스 몇 대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패키지 여행으로 오신 분들인가? 했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말그대로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남편과 나는 불안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어떡하지...?"
"일단 오빠 얼른 매표 빨리 해. 밀리면 엄청 기다려야될거야!"
우리는 주차장도 텅텅 비어있고 일반 관람객은 잘 보이지도 않는, 해가 겨우 막 뜬 겨울 아침에 교복을 입은 어마어마한 수의 학생들을 경계하며 매표소로 후다닥 달려갔다. 무사히 매표를 했다. 사실 조금 늦어서 앞에 먼저 들어간 학생행렬이 있었고 우리는 그 중간즘에 합류해서 입장할 수 있었다.
오케이, 입장은 했고. 생각해보자. 정원 내부는 넓으니 사람이 아무리 많아봐야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이들은 한 줄로 서서 인도하는 선생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설마? 설마. 에이, 설마. 우리는 다같이 순천만 정원을 가로질러 스카이큐브 탑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스카이큐브 대기 시간 엄청 길겠는데..?"
"어, 나도 똑같은 생각했어. 오빠, 빨리 걸어가자. 그거밖엔 답이 없어!"
우리 둘은 비장하게 외투를 여미고 길게 늘어서 선생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여학생들을 앞질러 가기로했다. 찬 공기가 마스크를 뚫고 콧속 깊숙이, 그리고 폐 안쪽까지도 깊숙이 들어왔다. 볼과 코는 불그스레해졌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노골적으로 뛸 수는 없었다. 괜히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수도 있고, 혹 민망해할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도 남편도 학생 때 수학여행이랄지 소풍이라는 걸 필시 갈 수 밖에 없었고, 에버랜드든 롯데월드든 서울랜드든 일반 이용객들에게 불편 아닌 불편을 야기했을 거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단체 이용객이 있다고 해서 일반 이용객들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벌써 10년도 넘게 지나간 학생시절을 떠올리며, 일반 이용객들이 학생 신분으로 떼지어 온 우리를 보곤 꽤나 공포감에 질렸겠다, 에버랜드라면 더 고통스러웠겠는데? 하는 둥의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렸다. 덕분에 숨은 더욱 찼지만 최대한 티나지 않게, 하지만 마치 경기에 임하는 마음으로 빠르게 걸어 앞서있던 학생들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 꽤 거리가 있는 스카이큐브 탑승장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1등으로 입장하는 줄 알았지만, 학생 주임 정도로 보이는 선생님과 학생회장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우리 바로 앞에서 갑자기 뛰어서 들어가기 시작한다.
어라?
우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설마 정원 측에서 단체관람객을 모두 태우고 우리 둘을 태우는 건 아니겠지, 하는 희망을 애써 가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어 그들을 잰걸음으로 뒤쫓았다. 급한 눈짓과, 몸짓과, 발걸음으로 탑승하는 곳이 어딨는지, 계단이 빠른지 엘리베이터가 빠른지 스캔하느라 두뇌를 풀로 가동해야했다. 앞선 두 사람은 안내데스크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서 단체이용권에 대해서 뭔가 문의를 하고 있다. 이 틈을 타 우리는 재빠르게 검표를 마치고 플랫폼 바로 앞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남편과 눈빛을 교환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후, 세입이다!"
다른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우리 뒤쪽으로 차례차례 들어오고 있었고, 대기가 어마어마하게 길어질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모든 차량에 빈자리없이 가득 가득 탑승해야했다. 우리도 예외없이 네 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타게 되었고, 스카이큐브의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운행거리가 꽤 길어서 차내의 어색한 기류가 몇 분간 흘렀다.
스카이큐브의 종착역에 내려서 또 한 번 습지까지 가는 갈대버스를 탔다.
가는 길의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갈대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었다. 오, 이런 정보는 없었는데? 가장 빠른 시간의 유람선 표를 끊어놓고 그 주변을 돌아본다. 이 날도 먹구름이 계속 오락가락 하던 탓에 춥고 사진도 잘 안나오고 날씨가 아주 "예술"이었다.
시간이 되어 탑승한 유람선은 기대했던 것의 몇 배는 더 좋았다. 습지의 끝자락에는 바다와 이어지는 여자만이 있는데, 유람선이 바로 그 앞까지 운행된다. 가까이에 갈대들이 울렁울렁대는, 말그대로 습지였다가 갑자기 끝이 안보이는 호수 혹은 바다가 스윽- 나타나니 참 재밌는 경험아닌가.
여자만
유람선에서 내린뒤에는 갈대숲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삼각대는 챙겨놓고 삼각대와 카메라를 연결하는 지지고리를 차에 두고와서 한참을 자책했다. 여긴 어디를 가도 포토존인데 그걸 놓고 오다니! 그래도 요리조리 꾀를 내어 카메라를 세워두고 둘이 많은 사진을 남겨왔다.
하늘이 너무 흐리다면 날려버렷...
아침부터 계속 날이 흐렸고, 찬바람에 지칠대로 지친 우리에겐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가장 큰 숙제였다. 여기서 다시 정원까지 가려면 갈대버스를 타고, 스카이큐브를 타야했다. 정원에 간다고 해도 마땅한 식당이 없을테니 시내까지 나가야할 것이다. 이리저리 검색도 해보고 둘러도 보다가 습지에서 일하시던 직원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러 갑시다~" 하며 유람선 매표소 맞은편 건물로 들어가시는 걸 목격했다. 그래도 직원식당은 있나보다 했는데 그 건물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 "휴게소"라 적혀있고 식당/카페 표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호도도도 따라 들어가보니 5,000원에 작은 뷔페식으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뭐 대단한 것은 없지만, 어찌보면 조촐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춥고 굶주렸던 우리에게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따뜻한 밥과 국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감사였다.
그렇게 습지를 다 돌아보고 다시 스카이큐브를 타고 순천만 정원으로 돌아왔다. 전날 못갔던 한국정원도 보고, 홍학도 본다.
정원을 돌다가 돌아나올 쯤에는 소나기가 후두두둑 떨어졌다. 한참을 근처의 화장실건물 처마 밑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비가 조금 그칠 즈음 겨우 정원을 빠져나왔고, 우리는 여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