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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ka Dec 31. 2021

복도식 아파트에서의 겨울나기

오늘도 크게 한 건 했다!


오빠, 물이 안나와!


"뭐…? 진짜야? 나 지금 씻으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를 친정에서 신나게 보내고 돌아왔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뛰노는 집이라 털과 먼지로 뒤덮인 우리는 어서 씻고 싶었다. 그런데 온수가 안나온다. 온수 쪽으로 레버를 확 넘겨봤지만 아주 얇은 물줄기로 쫄쫄쫄 흐르기만 할뿐, 온수가 온수가 아니었다.


문득 아파트 엘리베이터며 1층 게시판에 붙어있던 수도 동파방지 안내문과, 1년에 한 번 할까말까 한 아파트 단지 내 방송이 안내문과 같은 내용의 공지였던 것과,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며 최저온도가 영하 12도에 달할 것이니 각종 동파 사고 및 건강에 유의하라는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뭘 어떻게 해야해?


"와, 오빠 이거. 와, 진짜 수도관 얼었나봐. 뭐 어떻게 해야돼?"



겨울이 다가오자 동사무소에서 수도관 외부를 덮을 수 있는 보온용 뽁뽁이를 배부한 바 있었고, 경비선생님께서 집집마다 돌며 붙여주셨었다. 그런데 그게… 한 쪽 면이 잘 안붙어서 휘적휘적 휘날리는 상태이긴 했지… 아, 그래! 그런데 그건 이미 친정에 가기 전에 빈틈없이 붙어있도록 잘 손봐뒀었는데…? 그리고 작년 겨울에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오빠나 나나 이 집에 들어오기 전 각각 빌라 원룸과 오피스텔 원룸에 살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뭘 어떻게 건드려야할지 몰라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열어보자, 일단



열어도 되는 건지, 열수는 있는 건지 의문인 현관문 옆의 수도관 문을 낑낑대며 열었다. 뜯어도 되나 싶은 플라스틱 마개가 있었다. 살살 건드려서 꺼내보았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적힌 계량기가 보인다. 계량기를 덮고 있는 유리인지 플라스틱인지 모르겠는 덮개깨지지 않은 걸 보니 다행히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였다.


오케이, 핵심은 저 부분을 따뜻하게 해서 녹여주라는 말이지?



헤어드라이어를 현관 밖까지 끌어올 수단은 없었다. 다행히 바로 위에 있는 냉수관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냉수를 받아 끓일 수 있었고 행주와 발수건을 총동원해서 관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폴폴 김이 난다.


한 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라는 글을 읽었던 우리는 깨져버린 건 아니니 '너무 걱정말고 기다려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참 별 일도 다 있다' 싶은 복잡한 심정으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세면대 앞에서 포복절도할 일이 다 있다니


5분이나 지났을까, 쫄쫄쫄 얇은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만 들리던 화장실 세면대에서 갑자기 쿠아르르륵콸콸콸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얼마나 샤워가 절실했던 건지, 나를 향해 뒤돌아선 남편은 10년 넘게 만나면서 한 번도 보여주지않았던 '초감격'한 표정으로 엄지를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포복절도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웃기고, 나는 남편의 만화캐릭터같은 표정과 엄지척이 너무나 웃겼고, 그걸 웃겨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또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뽀얀 김을 내며 콸콸 흘러내리는 온수를 보며 한참을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수도관이 복도에 있으면 이런 일도 발생할 수 있구나, 싶었다. 한 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충격, 절망, 황당, 놀라움, 신기함, 안도감 등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꼈던 이 사건을 두고 '복도식 아파트의 설움'이 아니라 '복도식 아파트에서의 겨울나기'라고 이름붙이고 싶은 이유는 '아무튼 함께'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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