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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소리 Nov 21. 2024

외국어라는 인생의 두 번째 여권

"뭐?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제 와서 스페인어는 배워서 뭐하려고?"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내 오래된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언젠가 스페인어를 꼭 마스터하고 말거라는 다짐을 이야기할 때면 주변에서 으레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안다. 나도 익히 잘 안다. 이미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린 중년의 머리로, 발음조차 낯선 스페인어를 배우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때로는 모국어인 한글 단어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아 그거 뭐더라? 왜 그거 있잖아'하며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을 때면,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게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실감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국어로 소통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한다. 새로운 언어를 얼마나 빨리 유창하게 구사하느냐 보다는, 배우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편.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주체로서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언어 중에서도 내가 스페인어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스페인어의 명확하고 리드미컬한 발음이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섹시한 목소리로 블라블라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슬며시 웃음을 흘리기도 한다. 아 그날이 과연 오긴 오는거겠지?


아무리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그래도 너무 소수만 사용하는 언어는 배우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스페인어는 전 세계에서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라고 하니, 지금 배워두면 언젠가 세계를 여행하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곧바로 인터넷 서점에서 스페인어 스테디셀러 한 권을 구매해 독학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 속 단조로워질뻔 했던 일상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니, 이런 즐거움이! 비록 더딘 걸음이었지만,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간 잊고 있던 성취감과 자신감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평소 머리가 조금씩 굳어간다고 느끼던 차에,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쪼그라든 뇌가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외국어 학습이 기억력 향상과 문제 해결 능력, 창의력 증진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내 느낌이 그저 착각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평소 몰랐던 나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놀라웠다. 외국어를 쓸 때의 나는 한국어를 쓰는 평소보다 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더 대담해지기도 한다. 언어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해 가는 40대의 내가 대견하기도 하다.




학창시절, 그리고 20대에 외국어를 배울 때는 그 목적이 뚜렸했다. 그저 시험을 위해, 취업을 위해 배우는 공부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금새 손을 놓아버리기 일쑤. 하지만 성인, 특히 40대 이후에 배우는 외국어는 순수한 의지에서 비롯되어 더욱 의미가 깊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원어로 이해할 수 있고, 여행 중 현지인들과 대화하며, 새로운 취미 생활을 즐기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의무감이 아닌, 자유의지로 배우는 외국어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




비록 한 권의 교재로 시작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언어 학습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도 많다. 유튜브, 팟캐스트, 언어학습 앱, 화상 채팅 플랫폼, 각종 스터디 모임까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일상 속 언제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다. 출퇴근길에 팟캐스트를 듣고,  잠들기 전 10분간 단어를 외우며, 주말엔 온라인 스터디에 참여하는 등. 제대로 각 잡고 앉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 나의 비결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작은 노력이라도 매일 계속하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간 차곡차곡 쌓아온 언어 감각은 한 달만 쉬어도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 역시 언어 학습에서도 꾸준함이 핵심이다.




외국어 학습은 나를 위한 작은 선물과도 같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두드리는 일. 40대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 하나를 더 익히는 것을 넘어, 삶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는 또 하나의 여정이다. 


더 넓은 세상과 더 깊은 자아를 만나기 위해 40대의 우리, 함께 언어의 바다에 뛰어들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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