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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기

24년 12월 13일 금요일

by 보리남순

어제부터 콩을 털고 있다. 바짝 마른 콩을 펼치고 야구방망이로 탁탁 친다. 아이들이 어릴 때 들고 놀았던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는 이제 콩이나 깻대를 털 때 사용된다. 추억이 잔뜩 묻은 야구방망이를 한번 내려칠 때마다 잘 익은 콩알은 홈런 맞은 공처럼 멀리 도망간다. 털고 있는 콩은 농사지은 콩은 아니다. 이삭 줍기로 주은 콩이다.


몇 해 전부터 콩을 심지 않는다. 이유는 새 때문이다. 콩을 심으면 새들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싹이 나기 전 콩을 파 먹었다.

새들은 사람이 먹는 것들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가꾸는 것들이 맛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테다.

콩을 심고도 싹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새가 파 먹었을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는데, 동네 형님이 알려주었다. 콩이 나오지 않는다며 푸념을 하자 새가 콩을 먹어서 그런 거라며, 종묘상에 가서 약을 사다 콩알을 담갔다가 심어보라고 말해 주었다. 콩에 농약을 묻혀 심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종묘상에서 판매하는 봉지에 든 씨앗은 파랗고 분홍색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씨앗과는 다른 색을 하고 있다. 씨앗봉지 뒷면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주의사항

● 종자는 파종시기, 기후, 토질, 재배방법 등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탈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나타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음으로 재배 시 유의사항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종자소독약제로 소독처리 되어 있으므로 식용이나 시음용으로의 사용을 금하며, 맨손으로 만지지 았도록 주의하시고 신체에 특이한 증상이 있을 시에는 의사와 상의하십시오.


소독약이라고 쓰여 있지만 충이나 균으로부터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바른 농약이다.

올 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우들 몇 명이 텃밭농사를 짓는 관찰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 중 한 명이 씨앗봉지에 들어 있던 씨앗을 보며 말했다.

"씨앗이 왜 이렇게 이뻐. 먹어볼까?" 그러더니 씨앗을 입으로 가져갔다.

색을 입힌 씨앗이 초콜릿처럼 보였을 것이다. 농약 바른 씨앗이라는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호기심이다.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고, 옆에 있던 사람이 "뭔 줄 알고 입에 넣으려고 하느냐"는 만류가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경고문은 눈에 잘 띄도록 크게 써야 한다. 밑줄도 쫙쫙 두어 개 긋고 별표도 서나 개쯤 큼직하게 그려 놓아서 누구라도 읽지 않고 지나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소독약이라는 표현은 적확하지 않다. 충을 방제하기 위한 농약인지, 균 방제를 위한 농약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경각심을 갖도록 투명하고 정확하게 기재하여야 한다. 두리뭉실 설명된 것들에는 감추고 싶은 것들이 은폐되어 있는 것 같아서 께름칙하다.


내 밭에 심은 메주콩, 서리태, 땅콩을 새들에게 남김없이 여러 번 강탈당하고 난 뒤부터 콩을 심지 않았다. 굳이 농약에 담그면서까지 콩을 심으랴, 싶은 생각에 콩농사를 포기했다.


어느 해 늦가을이었다. 가장 늦게 수확하는 서리태 수확이 끝난 직후 산책을 나갔다. 길 위에 콩이 떨어져 있었다. 며칠은 못 본 체 지나쳤지만 곧 한알 두 알 콩을 줍게 되었다. 돌아올 때는 두 주머니가 불룩했다. 그렇게 떨어진 콩알을 줍다가 이삭 줍기의 재미를 알아버렸다.


그냥 걷기만 했을 때는 40분도 지루할 때가 많다. 반복되는 똑같은 코스, 아무도 없는 빈 들을 매일 걷는 일은 대부분 지루하다. 소로우가 똑같은 길을 걷다가 야생사과나무를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빈 것을 채우는 사색의 재료다. 야생에서 자란 사과가 고독한 산책자를 매혹시키며 <야생사과>를 쓰도록 이끌었듯이, 내가 주운 콩들에게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벌써부터 나는 콩을 줍지 않았더라면 닿지 못했을 생명체들을 상상한다. 다람쥐, 고라니, 마른논에 가득한 쇠오리와 같은 생명체들이다. 도토리를 줍는 다람쥐의 입장이 되어보고, 콩알을 주워 먹는 들쥐의 입장도 상상한다. 겨울 들판을 가득 채우는 소란스러운 새들의 이동을 생각하고, 거두어들인 콩과 남겨진 콩들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상상하는 것들에 구체적 서사가 쌓이게 되는 날, 관계는 더 긴밀해질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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