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와이드진에 회구름색 푸른 박스티를 입은 미리다. 아무도 찾지 않아 걱정될 정도인 구석진 카페 감성에 제법 어울리는 커다란 안경을 썼다. 그리고 그 앞의 작은 남자는 유니폼을 벗었을 뿐인데 그런 미리 앞에서 점점 더 움츠러든다.
"잘 지내지?"
"..."
오래전 직장 동료와의 만남은 늘 이런 식이다. 툭툭 끊어지는 말과 시선이 준우를 괴롭힌다.
"그래."
"..."
미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틀고 안경 귀퉁이를 매만지며 입을 뗀다.
"너. 뭐... 하고 있니?"
"네?"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까.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하긴 해야 할까. 그보다 우린 왜 만난 걸까. 골수에서 회오리 치는 질문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어루만지는 컵 사이로 혼란이 가중되다 급히 차분해진다. 복잡할수록 드러나는 의외의 평정심이다. 미리는 그것 하나로 기조실에서 버텨왔다. 눈앞의 남자 역시 물려받은 선배의 차가운 기질을 품고 있다. 동질의 공기가 팽팽히 힘을 겨루다 순간 사그라든다. 견고한 모래성이 건조를 견디다 못해 한 순간에 무너지듯 긴장이 바닥을 치고 내린다.
"거, 되게 안 어울리네. 노조라니."
"아유, 뭐, 그런 게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각자의 음료를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등을 기대고 있었던 두 짐승이 푸흡 웃음을 터뜨린다.
"마이 컸네."
"누나는 좀 작아졌다?"
"말하는 거 봐라."
돌이켜보면 기조실에서도 가장 날이 서있는 준우였다. 가장 어리고, 가장 어리숙하고, 가장 바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곳 현장에서 노조를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미리는 부끄러움도 없이 준우를 빤히 쳐다본다. 한참을 쳐다보니 내 눈앞의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모르겠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쇠약해진 준우는 비죽 튀어나온 수염 하나를 연신 주먹 쥔 검지로 닦아내고 있다.
"에휴,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사냐?"
"누나는 뭐, 다 됐지 뭐. 집에 건물 있잖아."
"내 꺼냐?"
"꼭 저렇게 말하더라. 아니 강남에 집 있고, 서울에 아파트 있고 그런 사람들은 다 그래. 자기들이 얼마나 가진 줄도 모르면서."
"알아. 너보다 훨씬 잘 알걸?"
"그런 사람이 그런 말을 해요? 뭐 놀리는 거야?"
"진짜로 내 께 아니라서 그래."
"차함, 부모님이 다 쓰고 가시겠냐고. 결국 그게 다 자식한테 가는 거지."
맞다 하며 피식 웃는 미리다. 묘한 승리감에 한껏 가슴을 편 준우와 고개 숙인 미리가 사뭇 대조적이다.
"언제?"
"예?"
"그러니까 언제 나한테 오냐고 그 건물이."
"돌아가시면 오겠죠."
"한 40년 후? 50년 후? 정도? 나 80 넘어서?"
준우는 생각보다 현실적인 미리의 계산법이 쿵하고 와닿는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해요."
"내가 뭐? 니가 시작했잖아."
"...아니, 뭐 그렇다 해도, 결국 그게 거기로 가는 거잖아."
"아니지.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되지."
"그럼, 뭐, 어떻게 받아들여요."
딱 맞게 탄산수를 가득 채운 얼음컵이 등장한다. 점원에게 가벼이 눈인사를 하고는 컵을 휘이 두르는 미리다. 탄산수는 차가워야 한다는 듯이 컵에 바짝 입을 대고 한 모금 크게 들이켠다. 그리고는 검지손가락을 펴 준우를 한 번,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한 번 짚으며 말을 이어간다.
"적어도 80까지는 너랑. 내 인생이. 정확히. 같다는 거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거지."
"..."
준우는 왜 그게 그렇게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뒷배가 없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리에게 작은 반감이 생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기에 반박하기는 어렵다.
"보면 누나도 인생 참 빡빡해."
"뭐가."
"그때도 거기서 그 개고생을 하더니. 지금도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
"그게 너랑 나랑 같은 인생이라는 증거지."
"에에이, 그러지 마요. 달라요."
"안 달라."
"누나는 몰라. 빽 없는 인간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있냐?"
"그니까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해. 그냥 건물 경영 같은 거 배워. 아니 진짜 미쳤냐? 내 딸이면 난...!"
"난,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속 시커먼 밑바닥 인생들 사이에 왜 누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어와 있냐고."
미리는 참으로 어린 이 후배가, 이제는 선배인 그가 애처롭고 고맙다.
"너 건물주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모르지?"
"아,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쩌어기 멀리 서서 봐야 돼요. 가까이 가면 다친다니까. 어흐, 무서워. 어흐, 싫어."
다정한 미리의 말씨가 괜스레 듣기 편해 몸을 떨며 어리광을 부려보는 준우다.
"준우야. 그 건물주 맨날 똥 치워. 사람 쓰면 마이너스야."
"똥 치우고 건물주면 나 그거 할게 누나."
"똥 싼 사람도 옆에 같이 누워있는데?"
"내가 그 사람도 싹 같이 치워줄게. 뭐, 한 이십 줘요? 두당 십만 줘도 나 진짜 감사히 할 거야, 누나."
"어이구, 우리 준우 든든하네."
"그러엄, 내가 이래 봬도 현장에서 선로에 내려서 말야 누나, 막 여기저기..."
"시체야."
"에?"
"똥 싸고 얼어 죽은 시체가 건물에서 종종 발견돼. 몫 좋은 건물에 술집은 반드시 있으니까."
준우는 움찔한다. 무거워지는 미리의 이야기가 당황스럽다. 건물주를 쉽게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현실의 비참함을 어필하고 싶었을 뿐.
"...아, 뭐, 우리도 현장에 간혹 뛰어드는... 사람들 있잖아요. 뭐..."
"몇 번이나 봤어?"
"...아직. 난 못 봤는데, ...본 형님들 몇 있어요."
"뭐래? 그 사람들."
"...관뒀죠."
침을 꿀떡 삼키고는 반쯤 식은 커피를 들이켜는 준우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마치 어르신 앞에서 소주를 털듯이 컵을 꺾는다. 컵의 머리를 잡아든 넓은 손바닥이 얼굴을 가린다. 잘도 찾아든 정적이 커피맛을 앗아간다.
"누나, 화난 거 아니죠?"
"아니지."
"누나, 나 진짜 건물주 쉽게 보는 거 아냐."
"알지."
"누나도 힘든데 미안해요."
"아니야."
잔뜩 웅크려 테이블 쪽으로 다가선 두 사람의 모습이 처음과 사뭇 대조적이다. 홀짝이는 효과음 속에서 미리가 입을 뗀다.
"유씨가 너 알더라."
"알겠죠, 뭐."
"강짱돌. 뭐, ...말, 나온 거 있어요?"
"없지. 있다가도 없지."
알만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다. 불편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분절이 참으로 알맞다.
"그렇게 됐어도 그 양반이 거기 부문장이잖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는 듯 턱으로 한 번 힐끗, 내리깐 눈으로 또 한 번 흘끔하는 준우다.
"아저씨 다 됐네."
"에에이, 누나, 아직 아저씬 아니지."
"너도 서른이다."
"누나보다 젊네요."
"젊어도 서른이야."
"그래도 누나보다 평생 젊지."
제법 친근한 두 젊은이의 늙음 타령에 지나는 카페 주인이 대신 부끄럽다.
"노조는 어디까지 아는 거야?"
"알긴 뭘 알아요. 그러는 누나네는?"
"아는 게 없다."
같은 기관 기조실 사람이었던 둘이서 소득 없는 방패전을 펼친다.
"다른 얘기 할래?"
분위기를 바꾸는 미리다.
"태림이 아저씨랑 어떻게 또 같이 일한대?"
"그러게."
"잘됐지 뭐. 거긴 그래도 안 더럽잖아."
"이제 더러워질 차례."
"거긴 누나 아끼잖아."
"아끼시지."
"우리 강대리 강대리 눈에 선하다."
"선하지."
"송수석은 뭐해요?"
"거긴 나랑 안 놀아."
"누나가 안 놀아주는 거 아니고?"
"음. 그치, 나도 거기랑 안 놀지."
잠시간의 냉랭함이 감돈다. 아차 하는 미리다. 치켜뜬 동공을 따라 뒤늦게 숙였던 머리가 따라 오른다.
"새*, 진짜. 많이 컸네."
"응? 왜? 뭐가. 당연히 쏭줌마랑 놀기 애매하지. 누나도 나이가 몇 갠데. 쎈 여자 둘이 힘들지."
"..."
"에이, 왜 그래요, 누나. 기조실 갈라진 거 다 아는 걸 뭐."
"송이랑 쏭은 구분하는 게 예의 아냐?"
"나한테 송씨는 쏭쥼마 하나죠."
"그래."
주섬주섬 형체 없는 에코백의 뚜껑을 잡아 여미는 미리가 옅은 미소로 눈짓하자 준우도 짐을 챙겨 일어난다. 반도 넘게 남은 얼음 탄산수와 말끔히 빈 머그컵이 떠나는 사람 둘을 배웅한다.
"누난 출근이야?"
"응."
"옷 갈아입으려면 시간 걸리겠다?"
"그래서 새벽부터 나왔잖냐."
"난 이제 가서 잘란다."
"그래, 고생했다."
"가요."
"응, 가고."
마치 일행이 아닌 듯 자연스레 깔끔하게 멀어지는 두 캐주얼인의 하루가 각각 끝나고, 또 시작하고 있었다.
2020년 3월 26일 목요일 맑음
<기재부문 강주임> 호랑이가 됐네
만만찮은 놈인 건 알았지만 호랑이가 다됐네. 그래,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든 건강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되는 거지. 내가, 우리가 먼저 칠 수 있을까? 아는 놈이 적이 되면 무섭다더니. 하지만 지금은 찝찝함 뒤에 찾아온 이 정체 모를 뿌듯함이 불쾌할 뿐.
<중부센터 신위원> 강짱돌이 끈질긴 새*
내가 못하면 미리 누나라도, 미리 누나가 못하면 기태림이라도, 기태림이가 못하면 유재희라도 하겠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떠나면 돼. 더러운 새*들. 봐라, 훈아. 형이 강짱돌이 잡는다. 곧 강짱돌이 보낼 테니까 뺨이라도 한 대 시원하게 갈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