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미 Jan 03. 2020

그들은 나를 그렇게 잘 안다고 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안녕하세요. 얘기 좀 할까요? 그렇게 나를 잘 안다고요. 참 이상해요. 눈 앞에서는 한 마디 못하면서 뒤에선 참 말이 많아.



가수 가인이 부른 '진실 혹은 대담'의 가사 중 일부다. 노래는 그녀를 둘러싼 출처 불분명의, 때로는 매우 저질스러운 루머들에 일침을 가한다. 나로서야 유명한 연예인도 아니고 기껏 나에 대한 가십은 작은 그룹에서 소비될 뿐이지만 어쩐지 공감이 되고 통쾌해 웃음이 나왔다.



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상대의 한 순간의 눈빛, 말투, 옷차림, 생김새, 행동거지 따위의 파편을 보고 그 사람을 간파했다는 듯이, 너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으스레를 떤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에 그들은 치졸할 정도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나는 네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기로 마음먹었어. 따라서 앞으로 네가 이런 사람이라는 증거를 낱낱이 수집할 거야.   



외국인 남자 친구를 사귄 적 있다는 평범한 팩트는 나를 보통보다 문란하고 백인만 좋아하는 '화이트 피버'로 만드는 증거로 쓰였다.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아 초대를 거절한 것뿐인데, 어느새 나는 자기와 '동급'의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하는 속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공된 나에 대한 이미지는 유독 가십을 좋아하는 누군가에 의해 바람처럼 퍼졌고 이내 기정사실화 되어갔다.



우리는 항상 셋이서 만나곤 했었다. 그중 한 명의 친구는 유독 주변의 가십을 좋아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도 가끔은 그 흥미진진한 가십을 즐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팔 할이 험담인 그녀와의 대화는 점점 지쳐갔다. 자기의 조건은 생각도 안 하고 사짜 남편을 만나려고 소개팅을 닦달하는 동료,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데다 행동거지가 상스러운 그녀 친구의 남편과 철 없이 그런 남자와 결혼한 그 여자. 그녀는 우리가 생전 만나본 적도 없는 그들의 소셜 미디어까지 굳이 보여주는 수고를 하며 공감을 얻어내려고 했다. 봐 봐, 얘들이 그렇게 염치가 없는 애들이야. 처음에는 나도 그녀의 말을 듣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의 삶에만 그토록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몰려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차마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토록 주변 사람들을 내장까지 도려내며 탈탈 털던 그녀가, 그 가십 속 사람들과 자주 연락하고 웃으며 지낸다는 것을, 개 중에는 몇 년 지기 친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혐오하는 사람을 자기의 바운더리에 그대로 둘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녀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내 주변 웬만한 사람들은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아, 그때의 웨이크업 콜이란. 어떤 세계에서 나는 아마 고집 세고 지랄 맞은 여자가 되어 있을 거고, 내 다른 친구는 분수에 안 맞게 돈을 펑펑 쓰는 허영심 많은 여자가 되어 있겠구나. 우리의 단점이 가장 극대화된 그림으로. 가장 자극적이고 재미난 가십의 모양으로. 남의 험담을 즐기는 사람이 무슨 고귀한 이유가 있어 내 욕 만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기에 나는 너무나 철이 들지 않았나.



나는 가십에 관해서 청렴결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 생활을 하며 서로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유전자에 강하게 각인된 본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난도질하지는 않는다. 준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카르마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인간들이 싫다. 즐거운 가십을 선물처럼 잔뜩 준비해왔다며 얼굴에 잔인한 웃음을 띄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 보이는 사람들이.  보따리 안에는 아마 나에 관한 것도 분명 있겠지. 없을 리가 없지.



한 때는 복수하고 싶었다. 나도 똑같이 도마 위에서 그들을 난도질하며 되갚아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발견한 건, 나는 사실 그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쪽이 부적절한 옷을 입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발언을 하든 솔직히 별 관심도 없고 그걸 또 굳이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피로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새로 생긴 맛있는 부리또 집과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점박이 길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뿐.




못 오를 나무 아래 겁쟁이 들의 외침. 떠들어라 실 컷. 나나나 난 그냥 웃지. 난 이런 게 쉽지.


그제야 나는 굳이 이 진흙탕 싸움에 가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게 됐다. 생각해보면 그런 가십의 메신저로 활약하는 인물 중 행복해 보이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남의 말을 옮기고 다니면서 역설적으로 남들의 시선에 가장 신경 쓰는 것들도 그 들이었다. 남을 깎아내리면 본인이 사랑스러워질 거라고 착각하는 불행한 인간들. 삶의 많은 부분을 남을 생각하느라 소진시키는 우매함.



세상에 나와 당신에 대해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들은 참 잘도 재단된 몇 개의 틀에 대고 우리를 규정하려고 한다. 그래 그 편이 쉽겠지.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다단하고, 좀처럼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니까. 라벨을 붙여서 쟤는 원래 저러는 애라고 분류하는 게 쉽겠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새벽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혼자만의 공간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본 적도 없다. 우리가 어떤 과거를 살아냈고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그러니 우리에 관한 그들의 C점 짜리 리포트는 들추어볼 필요도 없다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저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면 그만인 것이다. 그곳이야 말로 그 짜깁기 리포트가 속한 자리이기 때문에.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그녀들을 생각한다. 대학 시절, 그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위안을 받곤 했던 나는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낸 양 가끔 마음 한 구석이 허하다. 우리는 그녀들이 대학에서 어떤 강의를 수강했고, 어떤 책을 읽었으며 실상 얼마나 따뜻하고 여린 존재였는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그런 세상에 대고 그녀는 '자, 이게 너네들이 원하는 거지? 어차피 너네는 보고 싶은 것만 보잖아. 옛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모진 고통을 전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다. 자기에 대한 작은 지적만 들어도 밤 잠 못 이루는 주제에 누군가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 그들의 가식이 싫다. 그리고 그러한 가식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눈치를 주고 그녀의 편이 돼주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실망스럽다. '재밌잖아'라며, '내가 보니 너는 이러이러한 애인데 욕 좀 먹어도 싸'라며 세치 혀를 함부로 놀리는 그 기름 번들거리는 얼굴들이 떠올라 유독 역겨운 밤이다.






Photo: TOPHEE MARQUEZ , Pexel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