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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Nov 04. 2024

읽고 필사하고 꺼내보며 곱씹는 즐거움

투영하고 성찰하며 한 뼘 더 성장하기

어느덧 11월이다. 일본은 어제가 ‘문화의 날‘ 공휴일이었는데 일요일과 겹치는 바람에 오늘은 대체휴일이다. 삼연휴 마지막 날이지만 평소보다 차분하고 평온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앞의 이틀 주말을 크게 흐트러짐 없이, 너무 힘들지 않지만 나름 알차게 보낸 덕분이다. 이제 채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올 한 해, 그럭저럭 무탈하게 잘 지냈다는 안도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는 영향도 있으리라. 당초 계획한 은퇴와 관련한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선 성취감 또한 부지불식간에 지금의 내 마음 상태를 형성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 이럴수록 더 조심하고 절제하는 삶이 필요하다. 오전에는 일상 속 명상을 겸해 6킬로를 달렸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필사하고 기록한 메모장을 다시 꺼내 곱씹으며 하루를 보냈다.


사실 까닭 없이 마음이 고양되거나 심란할 때면, 네이버메모 앱을 열고 책 읽다가 하나씩 기록한 마음에 와닿은 글귀를 무작위로 읽어보며 필사하는 것은 내 루틴 중 하나이다. 마음이 움직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스마트폰에 저장한 터라 그다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오타도 종종 있는 문장들이지만, 마음이 삐죽거릴 때 서걱서걱 펜소리를 들으며 노트에 옮겨 적는 작업은 나에게는 기도나 명상과 같은 행위이다. 오늘은 다행히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기보다는 은은한 행복감을 유지하고자 몇 개의 문장을 필사했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를 음미하다 보면, 내 소소한 일상들이 모두 기도의 연속임을 느끼게 된다. 바람이 있다면, 더 이상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상의 빛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기도가 되었으면 한다.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뭔지 모를 조급함에 애달파할 때면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가 남긴 문장들을 천천히 새겨본다.


그렇습니다. 저는 또다시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다 안다고 상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의 모습이 제 생각과 같지 않자 울컥한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저를 작고 어리석고 외롭게 만듭니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30년 가까이 직장 생활하는 내내 무언가에 늘 진지하고 몰입해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에 주변으로부터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받으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와 보상과 혜택을 누려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어렵던 ‘몸에서 힘 빼기’를 조금씩 터득하고 자연스레 시야도 넓어지면서, 나의 몰입과 자신감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오만함으로 비췄을 수도 있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지나치게 목표지향적이고 인정 욕구가 넘치다 보니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이룰수록 외롭고 공허해지는 삶의 연속이었음을 지천명 언저리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적당히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법을 체득하고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의 낙낙함이 조금씩 몸에 조금씩 배면서 비로소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고독할지언정 결코 외롭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기적이 일어날 여지를 남겨두세요.


모든 것을 계획하고 하나씩 실행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통제하려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잔잔한 호소가 담긴 단순한 이 한 문장으로 내 삶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늘 넘치도록 꽉 채운 삶을 지향해 온 터라 ‘여백’이 있는 삶을 공백이나 결핍으로 착각하고 ‘여지’를 남기는 것을 무언가와 타협하는 것인 양 오해하곤 했다. 반드시 ‘기적’ 일 필요도 없고, 무언가 긍정적인 어떤 것에 대한 여지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자 기준이라는 편협한 오만을 벗고 세상을 좀 더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생이 반환점을 돌기 시작한 이제야 여백, 여유, 여지, 여가 등  여(餘)씨 형제들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르긴 해도 내 메모장에 기록된 글귀들 중 아마도 정여울 작가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 가장 많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정여울 작가는 내 최애 작가이다. 그녀는 내가 느끼는 생각의 궤적을 언제나 몇 발자국 정도 앞서가는 것 같다.  


단지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자립심은 누군가와 함께 할 때조차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혼자 있음의 편안함에 도취해 ‘함께 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에서 발견한 이 문장은,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고독마저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익숙한 내 삶의 방식에 균형을 잡으라는 일갈이었다.


인간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
거기 우리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 어둠이 있으니까.
거기 우리 자신의 뼈아픈 그림자가 투영되어 있으니까.


‘어둠’과 ‘그림자’는 정여울 작가의 많은 에세이에서 자주 나오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녀의 담담하지만 솔직한 글 덕분에 나도 내 어둠을 조금은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외롭고 힘들어도 내 삶을 받아들이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삶의 온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다림을 멈추는 순간 삶은 끝나고 만다.


최선을 다한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어떤 숭고함에서부터 누군가의 전화 한 통을 간절히 기다리던 초조함까지 기다림의 모양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세상에서 가장 설레면서 때로는 가장 잔인한 단어가 ‘기다림’이 아닐까라고 무심코 생각한 적이 있다. ‘희망고문’이라는 표현처럼 기다림은 결국 부질없고 헛된 행위라고 애써 기다리지 않는 척 뇌를 교란시킨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스스로에 얼마나 많이 되뇌었던가.


정여울 작가의 영향으로 그녀가 추앙하는 헤르만 헤세의 글귀도 몇 개 읽으며 일부는 다시 필사로 남겼다. 그의 에세이집(으로 알려진) <삶을 견디는 기쁨>은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마치 ‘찬란한 슬픔’처럼, ‘견디는 기쁨’이라는 표현이 묘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필사를 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 넘쳤으나, 특히 나는 아래의 긴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영양가 없는 집단주의를 배격하지만 공동체 의식을 잃지 않고, 고독하고 독립된 삶을 지향하지만 고립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결국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지금의 내가 공감을 받은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볼 줄 알며, 정신적인 아픔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취약점을 감싸주는 것은  참담한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오늘도 필사한 내용을 다시 꺼내 따라 쓰고 곱씹으며 내 인생의 방향을 점검하며 확인을 받았다. 그를 통해 오늘도 한 뼘 정도는 더 성장한 것 같아 뿌듯하게 삼연휴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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