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尾瀬)의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지난주 금요일, 하루 연차를 내고 목요일 밤부터 1무1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퇴근 후 집에 들러 냉장고에 남아 있던 음식으로 든든히 저녁을 챙겨 먹고, 홀로 떠난 꿈같은 시간이었다. 사실 이틀 동안 일본 백명산 두 곳을 오를 계획이라 마음속 긴장도 적지 않았지만, 다시 길 위에 선다는 사실에 설렘이 더 컸다. 밤 10시 40분, 신주쿠를 출발한 야행(夜行) 버스는 두 번의 휴게소를 거치며 어둠 속을 달렸고,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길을 나섰다.
나의 목적지는 군마현과 후쿠시마현의 경계에 있는 일본 최대규모의 고원습지인 오제(尾瀬)였다. 2007년부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오제습지의 양 끝단에는 일본 백명산 두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히우치가다케(燧ヶ岳, 2356m)와 시부츠산(至仏山, 2228m)으로 꼭 산에 오르지 않아도 두 산을 관통하는 오제가하라(尾瀬ヶ原)라는 습원을 걷기 위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한국의 100대 명산을 완등한 2017년 이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일본 백명산도 10개 정도는 등정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킷리스트에 담아 조금씩 실천해 왔는데, 이번에 12번째와 13번째 백명산을 이어서 등반할 목적으로 오랜만에 야간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버스는 정확히 4:30 출발지인 오시미즈(大清水)에 정차했고 나를 포함 10여 명이 하차했다. 사실 여기부터 등산로입구까지는 유료 셔틀버스가 다닌다고 하는데, 시간표를 보니 첫차까지는 1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거리가 3km 남짓이라 걸어가나 타고 가나 차이가 없을 것 같아 신발끈을 동여 메고 운동앱을 켜고 바로 산행을 개시했다. 조금 걷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나를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해발 1200m 숲 길에는 두세 종류의 새소리와 희미하게 어디선가 들리는 계곡물소리만이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고요 그 자체였다. 그렇게 완만한 산길을 따라 거의 15km 정도를 걸은 것 같다. 그사이 오니기리로 아침식사를 하며 잠깐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크게 힘들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걸었다. 엄청 큰 저수지인 오제누마(尾瀬沼) 둘레길을 지나면서부터 푸른 하늘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오를 산, 히우치가다케(燧ヶ岳, 2356m)가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본격적으로 치고 올라가기 전에 이미 꽤 긴 거리를 걸으며 고도를 많이 높여놓은 상태라, 히우치가다케 정상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그리 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인 시바야스구라(柴安嵓)는 온통 바위로 덮여 있었고, 그곳에서 인증샷을 남긴 뒤 1박 예정인 산장이 있는 미하라시(見晴) 방면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었다. 고도차 900m 이상의 구간을 비교적 가파르게 내려오다 보니, 하산이 오히려 체력을 더 많이 소모시켰다. 산장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무렵. 오시미즈에서부터 약 24km, 총 8시간 반의 긴 산행이었다. 체크인 전, 점심 식사와 수분 보충이 절실했다. 차갑게 얼린 잔에 내어준 생맥주 한 잔을 단숨에 반쯤 들이켰다. 여름 산행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하루 묵은 히우치고야(燧小屋)는 인근 다른 산장에 비해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2식 포함 14,000엔. 방은 고맙게도 다다미로 된 독방이었다. 땀에 젖은 팔토시 등을 널어 말리고, 책을 읽거나 잠시 뒹굴거리다 보니 곧 저녁식사 전에 목욕이 가능하다는 주인장의 안내가 있었다. 목욕탕은 성인 남성 네다섯 명이 들어가면 가득 찰 정도의 크기였고, 욕조는 사실상 세 명이 정원이었다. 다행히 이용객이 나를 포함해 네 명이라, 크게 붐비지 않아 충분히 몸을 담그고 씻을 수 있었다. 적당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온 뒤에는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 순간,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충만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이튿날 새벽 4시 조금 지나 기상했다. 오늘은 오제가하라를 지나 또 다른 백명산인 시부츠산에 올랐다가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다. 새벽 4:40경 조용히 산장을 나서려는데, 등뒤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단정하게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お世話になりました(신세 잘 지고 갑니다)“ 나도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산장을 뒤로했다. 확실히 고도가 있다 보니 아침 공기가 꽤 쌀쌀했다. 반팔만으로는 춥게 느껴질 정도였다.
산장을 나와 2분쯤 걸었을까, 오제가하라의 목도(木道)가 시작되었다. 주변은 온통 안개에 잠겨, 10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새벽잠이 없는 어르신 몇 분이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나선 모습을 빼면, 안개 낀 그 길 위엔 나 혼자 조용히 걷고 있었다. 뿌연 안개 너머의 풍경을 더듬듯 상상하다 보니, 앞이 보이지 않던 현실 속에서 막연한 불안을 품고 미래를 걱정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안개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걷히는 법인데, 그땐 왜 그토록 노심초사했을까. 보이지 않아도 안개 너머 길은 분명히 이어지고 있었건만, 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불안은 여전하고 걱정은 하루도 쉬지 않지만, 이제는 안다. 잠시 앞이 흐리다고 해서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계속 목도를 따라 길을 걸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새벽공기를 따라 정적 속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일들을 지나 여기까지 온 나를 돌아보게 된 길이었다. 그동안 함께해 온 나의 페르소나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 녀석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며 칭찬하는 길이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려보는 희망의 길이었고,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의 길이었다. 이 멋진 풍광 속에서 오롯이 나 혼자를 돌아볼 수 있던 고독과 성찰의 길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고 느끼게 해 준 감사의 길이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안개는 걷히고 시부츠산의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시부츠산 정상석은 등산로입구인 야마노하나(山の鼻)에서 800미터 정도의 고도를 치고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 몸 상태가 좋아서인지 등 뒤에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가며 2시간 정도만에 산정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어제 올랐던 히우치가다케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올라온 코스로는 하산이 불가해서 하산은 하토마치토게(鳩待峠)로 했다. 하산로는 완만하게 제법 긴 코스라서 이틀 연속 산행으로 지친 다리 근육의 부담을 오히려 덜어주었다.
11시 전에 하토마치토게에 도착해서 맥주 한잔 곁들여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오제도쿠라(尾瀬戸倉)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당초 계획보다 1시간 이상 일찍 끝난 산행이라 신주쿠로 돌아가는 버스 시각도 앞당기고, 버스정류장 옆 온천 시설에서 땀도 씻고 쾌적한 상태로 신주쿠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뿌듯하고 감사한 주말이었다.
어느덧 삶의 반환점을 돌아, 나는 지금 어쩌면 다시 출발점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길고 험한 여정이 계속되겠지만, 길은 언제나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반드시 꽃길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길 위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지키며 묵묵히 또 내 길을 걸어갈 것이다.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Beatles <The long and winding road>
https://youtu.be/fR4HjTH_fTM?si=_lD-XrB6if2FMTu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