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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같은 여행, 오늘도 달린다

새벽 달리기 단상

by 두기노

11월 말부터 남아 있던 유급휴가를 소진하며 일본의 서쪽을 주마간산처럼 여행하고 있다. 여행 중이든 아니든, 주말이면 거의 매번 새벽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평소에는 여행 같은 일상을 지향하고, 여행을 와서는 일상 같은 여행을 추구하는 편이라 달리기라는 루틴 자체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굳이 차이를 꼽자면,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발길 닿는 대로 달리다 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작은 설렘 정도일 것이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요즘, 아직 가보지 못했던 도시들과 다시 오고 싶었던 도시들을 차례로 여행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오사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소도시라, 도쿄에 비해 달리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도 확실히 적다.


아직 어둠이 짙게 남아 있는 고요한 새벽. 듬성듬성 불이 켜진 가로등마저 적막한, 낡고 오래된 거리를 달리다 보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 감정은 고립무원의 막막함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에서 오는 잔잔한 행복에 가깝다. 발소리와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 나라는 존재가 이 길 위에 또렷하게 남는 기분이 든다.

이맘때는 일출 시간이 늦어 더없이 좋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준비해 나와 달리기를 시작해도,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 조금 달리다 보면 몸이 서서히 달궈지고, 그와 동시에 사위가 여명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건물의 밀도가 높지 않고, 근처에 탁 트인 강이 흐르는 덕분에 아침해가 뜨기 전 스며들듯 붉어지는 여명을 거의 매일 마주할 수 있다. 이런 풍경을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행운이다. 아마도 여행지에서의 달리기가 더욱 좋은 이유는, 목적지가 아니라 이런 감동의 시간 속에 머무르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사지은 왼쪽 위부터 도쿠시마, 교토, 시가(히코네) 그리고 오사카 난바

노을인지 여명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이렇게 은근히 붉게 물드는 순간을 나는 무엇보다 사랑한다. 여명이나 일출이 새벽 달리기를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경험에 한 번 중독되고 나면 쉽사리 빠져나오기 어렵다.


여행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뛰는데, 조금씩 아침이 밝아오는 거리를 달리는 그 숭고한 시간은 나를 한없이 성장시키고, 조금 더 착한 사람이 되게 만든다. 그야말로 누군가 내게 주는 마법과 같은 선물이다.


보통은 뛰고 있는 동안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애써 골몰하는 일은 없다. 이런저런 번뇌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생각을 버리기에는 걷고 달리기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지난 이십 년 가까이 몸으로 체험해 왔다.


생각을 버리는 대신, 체온이 조금씩 오르며 몸과 마음에 쌓인 독소가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미움과 분노, 시기와 질투, 후회와 한탄처럼 부정적이고 과거지향적인 감정들은 어느새 감사와 성찰, 희망과 다짐 같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감정들로 자연스레 전환된다.


가끔은 좋든 싫든 먼 과거의 기억들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애써 불러낸 것이 아니니, 굳이 붙잡지 않고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조용히 내버려 둔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지 않을 때, 마음은 오히려 제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을 달리면서 깨닫곤 한다.


달리기를 하는 중에도 나만의 루틴이 있다. 보통은 뛰기 시작하자마자 기도를 한다. 묵주기도 중 환희·고통·영광의 신비를 매일 번갈아 가며 속으로 암송한다. 달리면서 기도와 묵상을 하는 셈이다. 물론 매번 온 정신을 집중할 수는 없다. 기계적인 기도에 그칠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 내게는 소중한 루틴이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비워지며 거의 완벽한 ‘무념무상’의 상태에 가까워진다.


가끔은 오늘 기도의 순서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얼렁뚱땅, 늘 ‘고통의 신비’부터 다시 시작한다. 달리는 발걸음에 맞춰, 예수님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하면서.


기도가 끝나고 나면 종종 팟캐스트를 듣는다. 평일 새벽에 달릴 때는 ‘삼프로’를 들으며 간밤의 미국 증시 흐름 등을 가볍게 훑는다. 반면 주말 러닝에서는 ‘매불쇼’가 단골이다. 웃음과 수다 섞인 유쾌하지만 진지한 시사방송이 유난히 느슨한 아침과 잘 어울린다.


이번 여행길에서는 감사하게도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건 아니다. 달리면서 수없이 되뇌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 반복되는 다짐은 어쩌면 나만의 기도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록 별다른 걱정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머지않아 어렵고 외로운 순간들은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 어떤 것들도 때가 되면 결국 다 지나갈 거라고.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되 자만하지 말고,
늘 겸손하게, 매사에 감사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자고.

지금처럼 매일의 루틴을 지키며,
내 몸과 마음을 소중히 하자고.

그리고 종국에는,
조금 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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