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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Nov 14. 2023

역사 및 정치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어져온 인연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삶 (1)

내가 처음 일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 9월 경이었다. 힘든 고등학교 생활 끝에 입학한 대학에서 순식간에 3년을 보내고 나니, 친구들 대부분은 군대에 입대하고 고등학교 시절 병력으로 군면제가 된 내 앞에는 그 당시 우스개 소리로 선동렬 방어율 수준의 형편없는 학점과 함께 외롭고 추운 겨울방학이 덩그러니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보니 또 어느덧 겨울 방학의 절반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촌 형의 '한번 놀러 오라'는 제의를 계기로 그저 며칠 놀러 가는 차원이 아니라 휴학을 하고 아예 일본어를 배우러 어학연수 갈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생 끝에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딱히 성적이 좋지도 연애경험이나 교우관계가 많지도 않았던, 그리고 남들 다가는 군대도 몸이 약해 면제되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현실에서 뭔가의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바로 일본어 기초부터 가르쳐주는 학원에 등록했고, 과외를 하나 더 늘여 그동안 모아돈 돈을 합쳐 하반기에 6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받을 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다. 염치 불고하고 사촌형이 사는 좁은 아파트에 얹혀 살기로 한 덕에 항공 및 수강료 외에 추가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유학원을 통해 수속을 마치고 단기 비자를 받아 그렇게 나는 도쿄로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던 터라 비행기 자체를 처음 타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 당시 학원은 JR야마노테선이 정차하는 타바타(田端) 역에서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고, 사촌형의 월세집이 있는 치바(千葉)에서는 전철을 2번 갈아타고 1시간 정도 소요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전 기초부터 시작해 한국에서 7개월 정도 학원을 다니고 들어간 도쿄의 어학원에서는 매일 아침 9시부터 3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귀가해서는 사촌형이 만들어 둔 음식과 슈퍼에서 사 온 반찬 등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TV를 보거나 사촌형이 돌아오기 전에 청소나 장보기 등을 해 놓곤 했다. 가난한 연수생이다 보니 여유롭게 놀러 다닐 형편이 못 되었기에 자전거 타고 옆동네 가서 공원 산책을 하고 도서관에 들러 스포츠신문을 보거나 팝송이나 일본가요 시디를 빌려와 집에서 듣는 게 게 유일한 낙이었다.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내 주변의 평범한 또래들에 비하면 이미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여러 인생의 질곡을 경험한 후 조금은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보내버린 대학생활 3년을 반추하며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세우기에 어찌 보면 그 당시의 소탈한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수를 마치고 복학을 해서 조금이라도 학점을 끌어올리기 위해 폭풍 같은 마지막 1년을 보낸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대로 학교문을 나서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던 탓에 제대로 공부를 해서 학부에서의 부진한 성적을 만회해보고 싶었다. 의도대로 대학원에서는 좋은 성적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전공과는 많은 관련은 없지만 남들이 꽤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직장에 들어가서는 2년 차에 오직 토익점수가 높다는 이유 하나로 선배들을 제치고 도쿄에 한 달간 연수를 가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감사할 따름이었다.


최초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일본대사관 부설 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일본어 수업에 주 2회 거의 빠짐없이 몇 년간을 다니고 있었기에, 1998년 3월 두 번째로 도쿄에 갈 즈음에는 크게 불편 없이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일본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해당 연수는 일본의 중견 보험사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보험업 종사자들을 초청하는 성격이었고 회사 소유의 연수용 건물에 딸린 개별 숙소가 제공되었다. 기본 숙식이 제공되는 연수의 기회를 제공받은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아직 버블의 여파가 남아 있던 시기에 돈은 남아돌고 어찌 보면 보험대국 일본의 우월감을 아시아 국가들에 표출하기 위한 의도도 다분히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대외적으로 많이 위축이 돼있던 시기라 한국에서의 참석자도 나 혼자였을뿐더러 일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국가 위상 자체가 동남아 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던 시기였다. 평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의를 듣거나 현장 연수를 받는 일정이었지만, 금요일 저녁과 주말엔 아시아에서 온 참가자들과 어울려 도쿄 여기저기를 놀러 다니곤 했다. 아직 신입사원 딱지도 완전히 떼지 않은 상태에서 오게 된 한 달짜리 해외 연수과정은 이후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와 함께 언젠가는 다시 일본에 와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안고 그렇게 귀국길에 올랐다.


연수를 다녀온 다음 해인 1999년 3월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은 와이프와 상의하여 남들이 많이 안 가는 일본 열도 남단의 오키나와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오키나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던 터라 인천에서 오키나와 나하로 가는 직항이 있었지만, 일요일 출발하는 일정이었음에도 거의 경비행기 수준의 조그만 기체에 얼핏 봐도 십 수명에 불과한 승객들을 싣고 이륙하였다. 함께 비행하던 소수의 승객들을 위하여 승무원들이 자리를 돌며 승객들에게 종이 뽑기를 하나씩 권하고 있었다. 내 앞에 온 승무원의 손에는 두 개의 주머니가 들려진 것처럼 보였는데, 혹시 신혼부부 아니시냐고 우리에게 물어봤고 그렇게 안내받은 주머니에서 뽑은 종이쪽지에는 무려 '제주도 왕복 항공권'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비행기에서 뽑기를 해 본 것도 전무후무하지만, 정말 랜덤 했던 건지 주최 측의 고마운 농간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번밖에 없을 신혼여행에서 경품에까지 당첨되는 행운을 누렸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세 번째 일본 방문으로 상대적으로 덜 붐비는 오키나와에서 꿈같은 허니문을 보낸 후 거짓말처럼 만우절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 이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부터 2005년 중반까지 다국적 컨설팅펌의 홍콩법인 소속으로 서울과 홍콩을 오가며 일을 했기에 한 동안은 일본에 갈 일도 일본어를 사용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알게 된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 헤드헌터로부터 글로벌 보험사의 일본 지사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받게 된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2005년 늦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하다 보니 국제전화를 통해 1차 면접, 회사 비용부담으로 1박 2일 도쿄로 날아가서 심층면접을 보고 난 후 얼마 있다 정식 오퍼레터를 받은 게 10월 중순 경이었던 것으로 보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던 것 같다. 그 당시 근무하던 글로벌 컨설팅펌에 사표를 제출하고 취업비자를 받은 후 12월 중순 경 나 먼저 도쿄로 이주하였고 가족은 이듬해 2월에 도쿄로 오게 되었다. 처음 인연을 맺고 12년 지나 일본에서 정식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했다. 아직 어릴 때라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걱정보다는 흥분과 설렘이 훨씬 컸던 시절이었다. 일본근무를 위해 소위 잘 나가는 ex-pat용 패키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4인 가족이 충분히 누리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대우를 받았고 아직 어렸던 아이들과 함께 그렇게 우리 4인 가족의 도쿄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게는 4번째 일본 입국이었다.   


홍콩에 이은 도쿄에서의 직장생활에 대해 주변의 많은 이들이 나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어와 일어를 반반씩 사용하였고 보험계리사라는 전문자격을 살릴 수 있는 역할로 적당히 인정받고 그보다 훨씬 좋은 처우를 누리고 있었지만, 일에 대한 욕심이 과해서 그런지 현재에 만족하기보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괴롭히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생각이 많고 뭔지 모를 불안과 긴장을 안고 살다 보니 언제나 몸 어딘가가 아픈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우울증이 아닌가 싶어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적도 있을 정도다. 직장생활에서 큰 행복감을 못 느낀 반면, 가족들과의 시간은 그나마 나를 지탱하는 원천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와 주말마다 공원에서 야구연습했던 일, 아직 유치원생이던 딸의 피아노 연주회, 수영장 견학 갔던 일 등 매 순간이 그야말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보석 같은 날들이었다. 도쿄 근교에서의 소박한 가족 여행, 가끔씩 주말에 주변 가족들과 함께 즐겼던 바비큐, 흥이 오르면 아이들을 집에 들여놓고 어른들끼리 갔던 동네 가라오케 등등... 회사생활에서의 결코 채워지지 않던 욕망의 그늘을 가족 및 이웃들과의 소소한 일상 속 행복으로 메우고 있던 시절이었다. 순전히 내 커리어 욕심 때문에 4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고 얘기했을 때, 이제 막 한국어 강습 알바로 재미를 붙이고 있던 와이프는 많이 섭섭해했고 큰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2010년 1월 한국으로 복귀할 때는 그간의 해외 군무 경험 등을 인정받아 과분할 만한 지위와 금전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거의 10년 가까이는 내 커리어의 황금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우쭐하고 자만한 나머지 실패와 실수도 많았던 시기였고,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에게도 충분히 잘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동안엔 1-2년에 한 번씩은 일본으로 여행을 갔던 것 같다. 도쿄 및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역,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한 규슈지역을 돌아가며 여행하곤 했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다며 서럽게 울던 큰 아이는 2019년 일본 고베(神戸) 국립대학에 입학을 하며 초등학교 입학과 대학 졸업을 일본에서 하게 되는 수미상관 구조를 실현하게 되었다. 아이의 입학식에는 교사로서 휴가를 내기 힘든 와이프를 대신하여 내가 대표로 참석하였고, 이를 핑계로 또 간사이 여행을 혼자서 하기도 하였다. 커리어의 정점을 경험하며 그만큼 변동성도 컸던 이 시절에 나는 소박하고 기복 없는 일상 같은 여행을 찾아 일본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한편, 2020년 정도부터 막연하게 '(조기) 은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고,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일본으로 복귀해서 커리어를 마무리 짓고 싶다는 열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나는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인생의 큰 실패를 경험한 직후로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자신감을 많이 상실한 터라 어떤 식으로든 리셋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을 많이 비우고 내려놓은 상태라서 그런지 무슨 일이든지 겸손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겨났다. 그런 와중에 욕심이 지나쳤던 십수 년 전 일본에서의 아쉬웠던 직장생활을 조금씩 떠 올리게 되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정작 스스로 행복하지 못했고, 늘 이를 악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시절. 옛날만큼 더 높은 지위와 명예, 보상을 위해서가 아닌 그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발휘하며 평범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간절하게 바라다보니 감사하게도 한번 더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상당히 좋은 조건까지 제안받았다. 이렇게, 2009년 12월 31일 아직 기간이 남아있던 일본 취업비자를 해지하고 한국으로 복귀한 지 13년 만인 2023년 2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큰 아이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국적 컨설팅펌의 일본지사에 컨설턴트로 취업을 했고, 둘째 아이는 재수끝에 입학한 대학에서 1년을 나름 성공적으로 보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사회생활하며 노력했던 외향성보다는 본래의 내향성이 더 도드라지다 보니 가족 외에 심지어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적당히 혼자의 시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본에서의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이 대체로 만족스럽다. 직장 내에서 사생활이 존중되는 것은 물론 동료 간에도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 좋고, 한국에 있을 때처럼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거나 타인과 비교당할 필요도 없기에 지금의 이 삶이 그저 좋을 뿐이다. 물론, 역사나 정치/외교 문제와 관련해서 보수니 진보의 문제 이전에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할 말하고 절대로 양보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강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저 소소한 생활/근무 환경으로서의 내 취향에 따라 즐겁게 살뿐이다. 십수 년 전에 비해 확실히 많이 성숙한 상태에서 도쿄에 다시 건너와 보니, 큰 욕심을 버리면 이보다 더 살기 좋은 환경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항상 겸손하고 더욱 감사하며 살아가자는 작은 다짐을 틈날 때마다 되뇌며,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일본에서의 생활을 되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국가로서의 일본과 소수의 혐한주의자들이 밉고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개인차원에서는 이렇게 고마운 인연을 어떤 식으로든 잘 유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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