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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Feb 14. 2020

새벽마다 이 노래

음악이 흐르면, 글 쓰는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종소리의 울림, 몽환적이고 알싸한 노래 도입부가 흐르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었다.

눈을 감자 고요한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모니터를 보며 손톱을 뜯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매일 새벽 1시, 비장한 마음으로 의식을 치르듯 이 음악을 틀었다. 백예린의 '야간비행'.

이런저런 음악으로 바꾸어 보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몇 자, 아니 글 한편이 완성되었다. 계속 들어 지겨울 법 하지만, 철석같이 믿었다. 뭐라도 쓰게 해주는 음악이라고. 퍽퍽하게 말라버린 생각과 마음을 노곤 노곤하게 녹여주리라고. 어서 내 머릿속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말이다.




"이제 시작이야."
두 남자의 숨소리로 채워진 방 문을 꼭 닫아주고, 거실로 나와 노트북 한글 문서를 켜고, 음악을 틀면서 중얼거렸다.
창백하게 하얀 빈 공간에는 재촉하듯 기다리는 커서가 보였다. 어떤 날은 첫 단어가 불쑥 나와 끝맺음을 할 때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할 이야기가 많아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였고 입으로는 다음 문장을 읊조리는 아름다운 새벽도 있었다. '야간비행' 음악을 시작으로 앨범 한 트랙을 다 돌고도 다시 몇 번의 재생을 거치면, 시계는 3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쯤 남편은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러 나와 "그만 써"라며 어깨를 툭툭치곤 했다.
"이것까지만 쓰고"로 받아치며 방에 들어가란 손짓을 허공에 두어 번 한 채, 다시 글자 하나하나를 불러냈다.




슬프게도  한 글자도 안 써지는 새벽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때면 멍하니 노래를 듣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비어있는 첫 페이지, 초조함에 손톱을 뜯으며 커피를 마셨다. 흙 맛이 느껴졌다. 텁텁하고 진한 한 모금에 버린 입맛을 살리려 맥주를 꺼냈다. 이 순간도 음악은 계속 귓가에 들렸다. 한마디로 글을 만들어낸 나만의 비법인 셈이다. 그렇게 수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들은 노래지만 가사를 따라 부를 줄 모른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저 전체적인 느낌이 나와 꼭 맞았다. 가수의 음색이 감성을 깨워줬고, 새벽의 공허함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문득 중간중간 귀에 들어오는 가사에 감탄하기도 했다.

 또 해가 뜰 때쯤 내 힘이 사라진 대도.
그대의 찻잔에 띄워 놓고 싶은
아무도 모르는 그 꽃을 찾아서
- 백예린 야간비행 중-




해가 뜨기 전,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이를 밀어냈다. 다 지우고 없앨 글씨라도, 가득 채우지 못했더라도 어김없이 뽑아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노트북을 덮고 음악을 껐다. 프린트된 글을 수정할 보라색 펜도 그 옆에 두고, 두 남자의 곁으로 발걸음을 돌린 지 일 년이 지났다. 작년 한 해동안 수없이 많은 고뇌의 새벽들이 모여 11월, 내 이름이 쓰인 수줍은 책이 나왔다.

<서른여섯, 나와 사랑에 빠지다 > 본의아니게 나이를 전체 공개한, 나의 첫 책.




예상했지만 책을 썼다고 내 삶이 외적으로 급작스럽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갑자기 큰돈을 벌거나 홍보가 잘 돼서 판매량이 올라가가는 어려울 것이란 걸. 내가 노력한 시간과 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고생했다고 다독여주는 것에 의미를 두자 했다. 막상 나온 책을 보니, 전투적으로 매달렸던 시간들에 비해 고요한 현실이 허무하고 우울하게 다가왔다. 내 글에 대해 자신감은 뚝뚝 떨어지고, 한 글자조차도 쓰기 힘들어진 지금. 이때 익숙한 첫 선율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던 거다.




한동안 일부러 '야간비행' 노래를 듣지 않았었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은 이 선율에,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열고 글을 써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드는 거였다. 글쓰기 전투를 막 끝내고 난 터라, 훈련된 사람처럼 무엇에 홀린 듯 몸이 바로 반응했다. 그때의 새벽, 한숨, 초조, 쓰린 커피, 가득 채운 글자, 뿌듯함, 프린트기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머릿속을 시끄럽게 헤집고 다녔으니까.




오랜만에 음악을 듣자마자, 흐트러져있던 몸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 기분 좋게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노래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거다. 왜 이제야 날 불렀냐고, 무엇이든 쓰라고, 나를 믿어봐, 열정적으로 써 내려가던 네 모습을 떠올려 보라며 말이다.



쭈뼛쭈뼛 서랍을 열어 노트북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힘주어 꾹 눌렀다.

 "다시 시작이야." 나지막이 들리는 내 목소리 뒤편으로 노래를 여는 종소리가 새로이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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