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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Apr 11. 2020

그림 배우러 가는 날

  




나는 그림을 참 못 그린다. 사람이나 집을 그릴라치면 꼭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그린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 내가 봐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꼭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 오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낭창하게 휘어진 가지의 선을 타고 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를 보면 그 가지와 꽃이 그려내 선이 하도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허공에 선을 긋곤 했다. 담 넘어 핀 탐스러운 흰 목련을 보면 노란색과 초록색과 고동색을 섞어 마술처럼 목련의 흰 빛깔을 표현하시던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손이 떠올라 머릿속으로 물감을 섞곤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판매하려고 진열해 놓은 그림 액자들에 온 마음을 빼앗겨 입을 벌리고 그것들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림 속의 작은 집들과 풍경들이 어찌나 정겨운지. 그 속에 들어가 살고만 싶다.    

30대 후반에는 한창 일에 치어 정신없이 살던 시절이었는데도 여름휴가 때면 그릴 줄도 모르면서 그림 도구를 챙겨갔다. 아이와 남편이 바다낚시를 하는 동안 근처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온전히 한 곳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푸르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바다와 하늘은 너무도 풍부한 표정과 여러 색깔을 하고 있었다.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막막한 마음에 붓 한번 들지 못해도 그냥 그 순간들 좋았다.     


하지만 그림을 배워 볼 기회는 없었다. 먹고사는 데 바빴기도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감각 때문이었는지 음악은 늘 가까이 있었고 그림은 멀었다.    


제주에 내려와 첼로를 전공하고 음악 교사로 재직하시다 퇴직한 신선생님과 사귀게 되었다. 그녀의 집 거실에는 그녀가 그린 색연필화가 고풍스러운 의자 위에 놓여있었다. 제주 돌집을 배경으로 마당을 내다보고 있는 늙은 여인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흙 묻은 장화며 항아리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흰 수건, 마당 한편에 막 씻어서 물기를 말리느라 쌓아 놓은 색색의 시골 살림들. 그림이 참 정겹고 따뜻했다. 그림 속 늙은 여인은 그녀의 엄마라 했다.    


그 그림을 보고 나니 나조차 잊고 있었던 마음 저 한구석에 구겨져 있던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충동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면사무소에서 문화강좌를 통해 그림을 배웠다고 했다. 나도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강좌 신청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 강좌를 신청한 게 지난 2월 초. 3월 초에 개강하기로 되어있던 강좌는 4월 중순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개강을 못 하고 있다. 신종 유행병인 코로나 19로 모든 사회적 모임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으로부터 72색 색연필을 선물로 받아두고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강좌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신선생님에게서 어떤 화가가 3명을 한 그룹으로 그림 레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도 거기에 끼고 싶다고 신선생님을 졸랐다.     


그 그림 레슨의 첫 시간이 바로 오늘이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이 아닌 자발적인 생애 첫 미술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은 마치 첫 미팅을 나가던 날의 대학 새내기처럼 설렌다. 꽃 그림을 배우고 싶다. 그래서 크기별로 유약을 아직 바르지 않고 초벌만 해둔 흰 접시에 이쁜 꽃과 식물들을 그리고 그것에 유약을 발라 구워낼 것이다. 이쁜 꽃그릇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내가 그린 그림 접시를 선물하고 흐뭇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     


수업이 오후에 시작되는지라 오전 일찍 고사리를 꺾으러 나가도 되련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그림 시간에 또렷한 몸 상태로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서 체력 조절을 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하루를 시작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꼼꼼하게 분칠을 하고 안 하던 눈 화장도 했다. 앞머리에 삔 하나만 찌르면 그만인데 오늘은 고대기를 꺼내 뻗친 머리를 말아 넣고 푹 꺼진 전수리 머리카락에 볼륨을 넣었다. 오늘은 사철 내내 입는 제주 생활의 만능 옷차림 몸빼 바지를 벗고 치마를 입을 것이다. 봄철이면 어디나 걸치고 다니는 검은색 잠바를 벗고 길게 하늘거리는 스카프를 목에 두를 것이다.     





12시 10분에 성읍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신선생님을 만나 함께 가기로 했으니 그러자면 이른 점심을 해 먹고 늦지 않게 가야겠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어서 점심 준비를 해야겠네.      



      


 작가 신성옥. 색연필화.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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