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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Aug 10. 2020

그가 돌아오다

찬스 잡기







뭔가 잘못되어가는 느낌이다. 왠지 불안하다. 벌써 이러면 재미없는데.     


매년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는 청귤청(풋귤청)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작업은 주로 뒤뜰에 있는 창고에서 행해진다. 영업용 냉장고가 있고 큰 싱크대와 작업 탁자가 갖추어진 작업실을 겸하는 공간이다. 한 달여의 청귤 시즌이 끝나면 창고는 다시 집안에서 더는 쓸모가 없어진 낡은 물건을 넣어두거나 이런저런 농사 기구들을 넣어두는 그야말로 창고 본연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창고를 다시 작업실로 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큰 행사가 있다. 대청소. 청귤청을 담기 위해 10개월여 동안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넣어두었던 각종 도구와 용기들을 꺼내어 닦는다. 작년에 쓰고 남았던 포장재와 스티커 등을 파악하고 새로 구입할 물건들의 수량과 품목을 정한다. 그리고 오래 쌓여 있던 정말 쓸모가 없어졌다고 결론이 난 물건들과는 완전한 이별도 이때 이루어진다.  


8월 10일. 서서히 청귤 작업의 시동을 걸어야 할 때가 도래하여 오늘은 반드시 창고 정리를 하기로 그와 결의를 하였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면 그와 함께 귤밭으로 나가 그는 예초기를 돌려 풀을 깎고 나는 썩은 가지 잘라내기와 나무 밑동부터 감고 올라가는 넝쿨 제거하기를 수행한 지 어언 2주일. 태풍 ‘장미’의 영향으로 제주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어차피 비 때문에 바깥일도 못하니 미뤄뒀던 창고 청소를 하자고 뜻을 모았던 것이다.     

아, 뜻을 모았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청소의 필요성을 찔끔찔끔 흘려 그 스스로 청소를 결심하게 하는 고도의 심리 전술. 최대한 그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 절대 주저리주저리 사설을 늘어놓거나 구차해 보이지 않게 짧고 간결하게 치고 빠지는 전술. 축구로 치면 롱패스가 아닌 짧게 짧게 끊어서 패스하면서 골대까지 끌고 가는 전술이랄까.     


어제저녁 식사를 하며 나는 마침내 골문 앞 슈팅 찬스가 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외국에서의 오랜 자취 생활과 군에서의 ‘탬 빵’ 취사병 경험으로 그는 여느 젊은 주부보다 나은 음식 솜씨를 갖추고 있으며 그가 해주는 밥을 먹는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들어왔던 터라 요리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지나치리만큼 높다. 하지만 어제 그가 끓인 김치찌개는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너무도 맛이 없었다. 떡볶이 국물에 김치찌개를 섞은 듯한 달짝지근한 맛이 과하게 나는,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초딩이 끓인 찌개 맛이랄까. 살짝 감칠맛만 나게 할 욕심으로 소량의 요리당을 첨가하려다가 그는 그만 그것을 왈칵 쏟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들지근한 단맛을 감추고자 고춧가루와 후추를 잔뜩 넣었지만, 그 해괴하게 달달한 김치찌개를 얼큰 시원한 맛이 나게 되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심히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찌개가 맛이 없게 됐다고 밥상에 앉기 전부터 계속 사과를 했다. 나도 첫 숟가락을 먹어보고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나의 표정을 살피며 연거푸 사과를 했다. 하지만 나에겐 목표가 있었다. 내일 반드시 그의 도움을 받아 창고를 치우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목표. 묵묵히 두 번째 숟가락을 먹고는 표정을 약간 풀고 말했다. “뭐 이 정도면 먹을 만하네” 그리고는 아예 밥그릇에 김치찌개를 몇 숟가락 넣고 비볐다. 그리고 몇 숟가락 더 먹은 후, “계속 먹으니까 찌개가 점점 맛있어지네? 먹을수록 맛있는데? 오, 괜찮아, 아주 괜찮아” 그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슈팅을 날렸다. 목소리를 바꾸어 한껏 인자한 표정으로 “내일 비도 오는데 예초하지 말고 늦게까지 푹 자. 우리 아들 매일 고생했잖아. 어차피 밭에 못 가니까 내일 아침에 엄마가 창고 정리할게. 엄마 일하는 거 신경 쓰지 말고 오랜만에 늦잠 좀 자” 그는 그 말을 냉큼 받아 말했다. “엄마, 그냥 우리 둘이 같이 얼른 하고 쉬자. 나 내일 아침에 꼭 깨워” 오우케이. 골인.    


영악한 엄마가 고생을 덜한다. 나는 종류별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재고 수량을 파악했고, 그사이 그는 청귤청 담는데 쓰는 그 많은 각종 통과 그릇 설거지를 깔끔하게 해서 물기 빠지게 각 잡아서 엎어놓았다. 버릴 거 선별하고 쓰레기 정리하니 청소 끝. 혼자 하면 한 나절일 일을 둘이 하니 한 시간에 끝났다. 역시 자식 낳길 잘했어.   


 


늙은 여우 엄마와 선머슴 아들 놈의 적응기가 의외로 순조롭다. 당분간 원팀으로 계속 가는 거야.






#하느림 #slow in nature #무농약청귤청 #풋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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