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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바꿈 Jun 01. 2024

출근시간 뒤에 숨어있던 아름다운 일상

차창 밖으로 펼쳐진 보통의 행복 그리고 기적

길고 긴 시간, 내 청춘을 쏟아부었던 직장에서 발을 뺐다.  모두 출근 준비로 분주한 아침을 여유 있게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주 큰돈(나의 연봉)으로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시간을 구입했노라' 스스로 다독였다.  그중 가장 값진 시간은 늘 출근준비로 쏟아부었던 아침이다.  숨어있던 4시간(내 시간)을 찾은 기분이라고 할까. 분주하게 지나갔던 아침일상이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왔다. 도로에 갇혀 매연을 들이마실 시간에 싱싱하고 맑은 향기, 그리고 아침햇살을 받고 있자니 '나 이렇게 살아도 돼? 정말 괜찮은 거야?' 되묻는다. 


이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기 위해 지역 스포츠센터를 샅샅이 훑어봤다. 새벽 수영을 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수강신청 페이지를 열었지만, 이미 자리는 꽉 차 있었다. 다른 종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고, 유일하게 비어있는 자리는 스크린골프 연습장 좌타 전용석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왼손잡이 좌파의 인생은 늘 불편했는데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싶었다.  게다가 나는 세 아이의 아빠, 국가에서 인증해 준 공식 능력자 아니었던가! 다자녀 30% 할인까지 받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퇴사 전 한 주를 5월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일상을 그리며 설렘 가득한 기분으로 보냈다. 


드디어 틀에서 벗어난 첫날을 맞이했으나 노동절과 겹치고, 어린이날 대체 휴일까지 이어지면서 기대했던 풀타임 백수 첫날은  시작부터 김이 팍 새 버렸다. 황금 같은 시간을 다이아몬드처럼 쓸 것이라 다짐했건만, 일주일을 직장인과 같이 쉬면서 보내고 나니 억울했다. 하지만 이내  출근시간 뒤에 숨어있던(오전 5시~9시) 일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긴 휴일이 끝나고 드디어 여유로운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월요병에 시달리며 각종 영양제를 털어 넣고 출근 준비에 한창일 시간, 나는 운동복 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차림으로 스포츠 센터로 향했다.  5시 40분, 나름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센터 주차장은  이미 자리 경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로비에는 수영복, 배드민턴,  골프가방을  멘  부지런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한 손에 수영가방, 다른 손에 정장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백열등이 켜지면서 "참 잘도 갖다 붙이면서 살았구나! 직장이라는 핑계로 이 시간을 이불과 싸우면서 게으름을 피웠었는데" 자성의 목소리가 귓가 울렸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월요일답게 도로에는 출근 차량으로 붐볐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 행렬에 내가 있었는데 생각이 들면서 흐뭇한 미소가 내 얼굴을 밝혔다.  평상시 같으면 잔소리 꽤나 했을 텐데 늦잠 잤다며  학교까지  태워달라는 막내의 카톡에도 망설임 없이 "오케이' 답장을 달아 두었다. 매일 아침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시작으로  직장 지하주차장을 거쳐 다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마치 지하철 같은 일상을 보냈었다. 막내를 태워주려고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창 밖을 내다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배웅하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손녀의 손을 꽉 잡고 차 다니는 길을 안전하게 건넌 다음 허리 숙인 할아버지와 두 손 하이파이브로 마무리하고 각자의 길을 걸었다. 손녀는 계속 뒤돌아보며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이마 위로 올려 스마트폰을 보면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손은 손녀를 향해 흔들어 주신다. 멀찌감치 가는 손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흡연실로 자리를 옮기신다. 바로 이어 택배 차량이 들어왔다.  잽싸게 주차를 하고 화물칸 문을 열고 배달할 물건을 죄다 끄집어낸 다음 동, 호수별로 분리를 시작한다.  주차장 정면으로 보이는 쓰레기통 위에는 까치가 날아와 '뭐 먹을 게 없나' 살펴보고 있다.  까치도 평온한 아침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차창 밖으로 출근시간 뒤에 숨어있던 보통의 일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기적이다!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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