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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n 28. 2020

비가 오면

연산군과 김치전

  나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나고 자라 성인이 되어선 서울에서 줄곧 생활했다. 시골생활이라곤 방학 때 잠시 잠깐 할아버지 댁에 머물다 온 일뿐. 시골이나 적막의 세월들을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다. 할아버지 댁의 뒷마당 텃밭에 가 상추나 오이를 따 본 일은 있어도 밥해 먹고 빨래하고 좁게 열린 길 따라 한적한 마을 산을 올라본 경험은 없었다. 이런 내가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6개월 정도 인적 드물고 차분한 시골에서 남편과 단둘이 지낸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골이라기보다 강화도에 위치한 한 작은 섬 ‘교동’이다. 지금에서야 강화도와 교동을 잇는 ‘교동대교’가 생겨 차로 오고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머물던 2011년도에는 강화도 선착장에서 2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배는 제법 커서 타고 간 차도 같이 실을 수 있었는데 차에 대수는 제한되어 있어 배가 뜨는 시간보다 30분 일찍 가서 기다리곤 했다. 배가 뜨는 과학적 원리를 알면서도 나는 늘 우리가 몰고 온 승용차가 배로 들어가는 순간이면 배가 가라앉지는 않을까 하는 아이다운 생각을 했다. 배가 출발하면 나는 남편과 객실로 나가 서울 집에서 준비해온 보온병에서 뜨거운 차를 따라와 한 잔씩 마셨다. 그때 나는 첫애를 임신 중이었다. 입덧 탓에 때때로 불현듯 올라오는 심한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으로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커피를 좋아했지만 나를 위해 참고 차를 같이 마셔 주었다. 차를 마시며 출발하는 뱃머리를 보고 있으면 끝도 없는 물보라가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교동으로 발령을 받은 후 나는 입덧이 심해져 서울에 남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아침, 창문을 열면 매연이 숨을 타고 들어와 메슥거림이 더 심해졌다. 그 시절엔 남편과 따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불안했다. 나는 다니던 직장에 병가를 내고 남편을 따라 교동으로 들어갔다. 서울은 뱃속 아기의 정기검진 때만 다녀갔는데 임신기간 중 머물던 그 교동 생활의 6개월이 내 번잡했던 그동안의 삶 중 가장 마음이 여유로웠던 호시절이었다.


  교동은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다. 대부분 그곳에서 태어나 섬을 떠나지 않은 토박이들이 섬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멀리 북한 땅이 보이고 관사에 있으면 이른 새벽이거나 기척 없는 여름의 한낮에 북한의 방송이 들리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지척이 북한이라 좁은 한반도가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았다.


  그곳은 초록이 무성해 이른 저녁을 먹은 후 남편과 낮은 길을 택해 산책길에 나서곤 했다. 관사 뒤로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임신 중이고 배가 제법 나온 후론 정상까진 가지 못했지만 산 밑자락에 연산군 유배지가 있어 둘러보고는 했다. 지금은 위리안치 재현 건축도 들어서고 달라졌다고 들었는데 내가 지냈을 시절에는 그저 쓸쓸함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엔 내 생애 처음 보는 여름 꽃들이 피어 있었다. 한 날은 꺾어다 집에서 쓰는 컵에 꽂아 두었는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시듦을 보고 후회했다. 그냥 뒀으면 명대로 살다 갔을 것들이 내가 꺾어버려 생의 반도 살지 못하고 사위어 간 것 같아 미안했다. 그 뒤론 절대 그러지 않고 산책길에 만나면 한참을 보다 관사로 돌아다.




  교동은 작아도 섬이라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관사의 베란다 문을 열고 여름의 비 냄새를 맡았다. 오전부터 내리는 날이면 점심을 먹으러 관사로 오는 남편을 위해 김치전을 부치곤 했다. 그 전 겨울 친정엄마가 보내준 김장김치를 꺼내 잘게 잘라 부침가루나 밀가루만 넣으면 됐다. 간이 싱겁다 싶으면 김치 국물을 좀 남겨 두었다가 넣으면 딱 맞았다. 냉장고에 고구마나 남은 자투리 양파가 있으면 대중없이 썰어 반죽에 넣었다. 그 맛은 별거 없어 보여도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게 하는 맛이었다. 입덧은 그동안 기억했던 내 혀의 감각까지도 새롭게 해 그냥 김치는 먹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김치전은 잘도 넘어갔다.


  김치전을 두둑이 먹고 남편이 다시 일을 하러 가면 나는 베란다 의자에 앉아 비를 보며 연산군을 생각했다. 연산군은 이곳에서 말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11월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은 9월에 교동에 유배되었으니 이곳의 여름은 몰랐을 것이다. 여름의 꽃들이 다 지고 매미 울음이 들리지 않아 더욱 고요하고 쓸쓸했을 이곳에서 개다리소반에 밥상을 받았을 그를 오래 생각했다. 일곱 살에 세자로 책봉되어 열여덟에 왕이 되었다. 그러나 평생을 친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어긋난 생을 살다 가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를, 그저 어미 잃어 몸부림쳤던 이로 조금은 기억해 주자 싶었다. 그가 가을이 아닌 여름의 교동을 보았다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을까.


 과거 누군가 가장 참혹했던 시간을 보냈던 그곳이 500년이 지나 또 다른 이에겐 가장 잔잔하고 고적했던 시간이었음이 아이러니하다. 이젠 비가 많이 오는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난 비가 오면, 그 시절 내가 머물던 교동과 그곳에서 먹던 김치전과 연산군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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