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번 나무거죽 같은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아 본 적이 있다. 임종 직전 할아버지의 병상에서였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데면 데면했다. 외할아버지는 팔순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외할머니와 50대에 사별하고 그때까지 혼자 사셨다. 키가 껑충 크고 몸이 말랐지만 인물 좋고 놀기 좋아해 친구가 많았다 한다. 사람 좋고 흥이 넘치면 늘 그렇듯 외할아버지는 생활력 없고 물려받은 전답 팔아 노름하느라 외할머니의 속을 꽤나 상하게 했다. 다행히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근동 마을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다. 할머니는 작은 가게를 열어 밥장사를 시작 해 자식들 건사하고 공부시키고 때때로 노름판에 쫒아 가 할아버지를 잡아오며 살았다. 내 엄마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환갑을 앞둔 할머니가 의료사고로 먼저 떠나자 할아버지는 그 좋아하던 노름을 끊었다. 말 수 없고 숫기 없어진 할아버지를 보자 위로 오빠만 셋에 막내딸이었던 엄마는 공부를 하러 도시로 떠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내 엄마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 할아버지가 무능했구나’ 싶었다. 한창 뻗어 나갈 자식 앞길을 막고 주저앉힌 것 같았다. 그래도 나를 꽤나 예뻐하셨던 기억이 있지만 한창 예민할 시기에는 재주 많고 쓸모 많은 내 엄마가 할아버지 때문에 평범하게 사는 것 같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응당 부모라면 자식 공부는 하고 싶어 하는 것만큼 시켜줘야 아닌가 생각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무엇이든 보면 따라 만드는 솜씨가 좋았던 엄마는 고등학생 시절 대학에 가면 디자이너 공부를 하고 싶었다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를 기숙사에 데려다주러 함께 서울에 왔을 때였다. 엄마가 혼잣말처럼 ‘너는 참 좋겠다. 나도 대학교 가 디자이너 하고 싶었는데’ 하던 말에 내 기준에 ‘부모복’ 없는 엄마가 안타까웠으니 안 그래도 정 없던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미웠다.
그런 할아버지가 일 년이면 두 어번 어느 땐 해를 걸러 우리 집에 오셨다 가셨다. 시골에 홀로 계시다가 병원을 오시거나 친인척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행사가 있을 때였는데 할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이면 엄마는 시장에 가 다슬기를 가득 사 왔다. 크고 빨간 ‘다라이’에 다슬기를 붓고 한나절 정도 꼭 해감을 했다. 다슬기들은 ‘다라이’벽에 잔뜩 붙어 이었다. 그 옆에 가면 날것의 흙냄새가 났다. 오랜 시간 햇빛을 피해 자라온 생물의 냄새였다. 물이끼를 먹고 자란 그것은 자칫 비릿하고 음습했다. 학교가 끝난 후 집에 왔을 때 그 냄새가 나면 나는 외할아버지가 오셨단 것을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다슬기장을 유독 좋아하셨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연락이 오면 다슬기장을 만들었다. 다슬기장은 재료 손질부터 손이 많이 갔다. 해감을 한 다슬기를 찬물에 또 여러 번 씻어야 했다. 혹여 다슬기 껍데기에 남아있을 불순물을 제거하고 다시 찬물에 담가 두면 다슬기들이 머리를 삐죽 내민다. 머리를 내민 다슬기들이 보이면 팔팔 끓인 물을 붓는다. 이 작업을 해야 다슬기의 빨판이 떨어지는데 먹기도 좋고 보기도 깔끔하다. 그런 후 간장과 육수에 맛을 더하는 야채를 넣어 함께 조리면 완성된다. 만들기 전에 다슬기의 양을 보면 늘 어마어마한데 막상 장조림으로 만들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조려낸 장은 설탕을 따로 넣지 않아도 달짝지근했다. 할아버지는 간장은 떠서 양념하지 않고 구운 김에 밥과 함께 싸 드셨고 다슬기는 이쑤시개로 빼 드셨다. 상을 물릴 때 보면 다슬기의 껍데기가 수북 했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시는 동안 다른 반찬이 많아도 매끼 다슬기장을 찾으셨다. 다시 시골로 내려가실 때 엄마는 꼭 할아버지의 찬 통에 다슬기장을 수북이 담아 주었다.
-아버지, 가시면 꼭 먼저 냉장고에 넣어 놓고 드셔
외할아버지는 엄마의 배웅하는 말에도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고속버스가 출발하면 엄마는 한참을 버스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았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다슬기장을 만들지 않는다. 예전처럼 자연산 다슬기도 많지 않거니와 딱히 우리 가족이 다슬기장을 찾지도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우연히 찾은 식당에서 반찬으로 다슬기장이 나오면 엄마는 ‘울 아버지 좋아했던 건데’ 하며 웃었다.
언젠가 내 엄마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걱정돼 포기했던 학업이, 그때 엄마의 등을 떠밀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아비라고 제대로 된 뒷바라지 하나 해 준 적 없는 할아버지가 밉지 않냐고. 엄마는 내게 말했다. 아무리 못난 부모라도 제 살 떼어 낳아줬으니 부모라고.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 주고 없는 살림에 딸이 좋아한다고 당시엔 보기도 힘든 세계 문집도 들여 줬던 아버지가 그립다고 했다. 자신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라도 살아계셔 줘서 그것도 감사하다고.
엄마의 대답을 들은 난 아직도 덜 컸음을 알았다. 엄마의 나이쯤이면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내가 그동안 정의했던 ‘부모 노릇’이란 게 무엇일까. 자식을 둘이나 낳아 키우면서도 나는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