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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l 02. 2020

황석영과 키노(KINO)

‘도시락’을 먹던 시간

  나는 남쪽 지방의 한 여고를 나왔다. 1900년도에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학교답게 일주일에 하루는 춥고 무지막지 넓은 강당에 나가 지루하기 짝이 없던 교목 선생님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여고생에게 좋은 말이란 게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일렬로 차가운 마룻바닥에, 크느라 넓어져 가는 엉덩이를 대고 있으면 시작도 하기 전에 빨리 교실로 돌아가고픈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키가  뒷줄에 가까웠다. 우리 뒷줄 라인 패거리들은 담임 몰래 CD플레이어와 오빠들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바야흐로 HOT와 젝스키스, 그리고 GOD만이 우리의 구세주였던 시절이었다.


  나는 사실 HOT도 젝스키스 파도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문제집 사라고 준 돈으로 김동률 CD를 사서 듣고 지금은 폐간되어 없지만 ‘키노(KINO)’라는 영화잡지를 책가방에 넣고 다녔다. ‘키노’의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읽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도 모를 평론을 읽고 또 읽고 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감수성 예민했던 내 여고 시절에 지적 허영심을 채워 준 최고의 잡지임은 분명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게 되면서 본가에 있는 내 물건들을 정리하다 튀어나온 ‘키노’를 보고 나는 또 놀랐다. 10년이나 지나 읽어도 여전히 모를 말 투성이었다. 여고생의 감수성이 이처럼 무모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내게 김동률과 ‘키노’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먹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일생 중 입에 가장 뭘 많이 달고 다닌 시간이었던 같다. 아침을 절대 거르지 않는 습관 탓에 새벽부터 밥 한 공기 뚝딱 하고 엄마가 싸준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가방에 야무지게 챙기고 다녔다. 하지만 점심은 벌써 2교시 끝나고 나면 친구들과 해치웠고 정작 점심시간에는 학교 매점으로 달려가 컵라면과 과자를 사 먹었다. 그때 친구들과 주로 사 먹던 라면 이름은 ‘도시락’이었는데 팔도에서 나온 라면으로 사람 좋은 아줌마가 머리에 수건 쓰고 있는 그림이 특징이었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면이 채 익기도 전에 젓가락 갖다 대기 바빴는데 몇 젓가락 먹으면 남아있지 않아 늘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땐, 먹는 것과 읽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었다. 싫어하는 과목 시간엔 뒷자리 친구와 자리 바꿔가며 소설 읽느라 45분 수업 내동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고 내가 '윤희'로 이입되어 한동안은 헤어 나오질 못했다. 상투적이지만 별 보고 등교하고 별 보면서 하교하던, 막막했던 고3에도 김동률과 키노 그리고 '문학'이 있어 힘든 줄 몰랐다. 수십 개의 ‘도시락’을 먹는 사이 키도 크고 몸도 자랐고 문학에 대한 열정도 무럭무럭 자랐다. 종래에는 '대학에 가서 글을 쓰겠다'라는 목표까지 생겼다. 믿도 끝도 없는 의지가 '문학'을 향해 '가열게' 발동됐던 시기였던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야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믿었으니, 참 순진무구하다. 지금의 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어떤 하나에 대한 열망이랄까 집착이랄까. 당시 내게 문학은 교보다 더한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의 놀잇감도 달라지고 시대가 변해 문학도 소위 팔리지 않으면 ‘돈’이 안된다. 유명한 인기 작가들도 책 팔아 인세로 얻는 수입보다 인세 외의 강연료 등이 더 수입이 좋다 한다. 황석영과 ‘키노’를 좋아했던 지난날 여고생이 들으면 납득가지 않을 세상이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문학’도 변한다는 것을 이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난 여전히 믿는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더 인간답게 진화시키는 것은 결국 문학과 예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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