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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Apr 01. 2020

단상으로만 보지 말 것.

변신



카프카. 변신. 이것만큼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소재가 있을까 싶다. 한국에서 자랐다면 누구나 들었을 법한-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 100권 안에 꼭 들어가 있던 책 아니던가. 나도 그랬다.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냐며 친구들끼리 으레 자랑을 늘어놓을 때 누구든 상관없이 제일 먼저 나오는 도서 목록이다. 그 누구나 책은 제대로 읽지 않고, 책을 짜름히 넘겨 맨 뒤쪽 옮긴이가 해석해놓은 옮긴이의 말을 제일 먼저 보긴 하지만 말이다.


누구나 아는 줄거리를 잠깐 읊어보자면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갑자기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벌레가 된 자신의 모습에 점점 적응하며, 어떻게 자신의 몸을 숨길지 골몰한다. 그러는 도중 가족들은 난리가 난다. 이 끔찍한 괴물이 우리집의 아들일리가 없다며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집세나 월급을 생각하는 그레고르를 중심으로, 하숙생들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어쨌든 하숙생들도 돈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지극정성으로 오빠를 간호하다 뛰쳐나가는 여동생, 갑충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늙은 할멈... 이야기는 극으로 치달을 것도 없이 단지 벌레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던 그레고르 벌레에게 아버지는 사과를 던지게 되고, 그레고르의 등에 박힌 사과는 점점 썩어가면서 그레고르도 죽게 된다. 잠깐 혼돈의 상황이 오는 듯 싶다가도 이내 가족들이 언제 거대한 벌레를 봤냐는 듯 고요해지고, 딸아이의 결혼에 신경을 쓰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작품을 처음 읽었던 학창시절에는 이게 무슨이야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읽을 때는 그레고르가 불쌍했다.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읽으니 벌레로 변한 와중에도 출근을 걱정하고, 회사 상사 눈치를 보며 아버지에게 한번도 반항하지 않는 그레고르에게 화가 났다. 대학원생이 되어 이 단편을 다시 곰곰이 읽으니 출판 10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근대- 혹은 현대인의 소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친구들의 말로 자낳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자본주의라는 메커니즘 안에서 인간, 그것도 가족의 구성원 조차 부품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표면적인 작품의 비평은 다음과 같다. 작품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갑충Ungeziefer)는 늘 피곤하고 불안한 상태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거나 아버지께 맞서고 싶다는 소망은 곧 변신을 통해 가능했다. 즉, 변신은 사회 권력과 피곤한 인간관계에 맞서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 갑충이야 말로 환상과 현실이 결합된 소재이다. 사회의 문제와 인간 내면의 고독을 더욱 강렬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변신을 통해 자본주의적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내면과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만 무장된 인간문제가 어느정도 정화되지만, 벌레와 대조되는 젊은 육체를 통해 치열한 삶에 대항하는 삶이 아닌 그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앞서나간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가? 카프카라는 인물은 그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나간 사람이다. 혹자는 그가 내성적이면서도 조용히 자기만의 업무에 골몰했던 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평가를 한다면 당신은 카프카 작품들을 다시 읽어야만 한다. 그만큼 다방면의 소재를 다룬 문학인이 없다. 자본주의, 개인의 소외, 현대화의 주제들로부터 시작하여 소수문학을 생산한 대표작가이다.



문학가는 떠돌이인데, 왜냐하면 글 쓰는 이는 제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제도 밖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어떠한 꿈이 어떠한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는가, 그 제도화는 어떠한 모순을 드러냈는가, 그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를 문학은 꿈이나 행복에 비추어 드러내는데, 그 와중에도 문학의 특수한 점은 그 드러냄이 결핍에 의지해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꿈에 비추어 어떤 것이 어떻게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의 자율성이 획득한 최대의 성과는, 현실의 부정적 드러냄이다. 그 부정적 드러냄을 통해서 사회는 어떤 것이 그 사회에 결핍되어 있으며, 어떤 것이 그 사회의 꿈인가를 역으로 인식한다. (김현, '문학사회학')



카프카는 문학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시대의 결핍된 하나의 단상을 들어냈다. 하지만 부정적인 드러냄은 일차적인 문제이다. 누군가는 카프카가 왜 소수문학작가냐고 묻는다. 더 파고 들어가 보았을 때, 작가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 당시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의 시기로, 단순하게만 상상해 보아도 그 시대의 상황을 파악하기 쉽다. 흔히 소수 문학의 소수를 생각할 때는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소수라는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이 소수는 다수에 반하는 성격을 가지는 무리를 나타낼 때 쓰이며 종종 이주민, 성 소수자, 유대인, 노동 등의 분야에서 쓰인다. 변신에서의 소수성은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자'와 '소수성'에 대해서도 잠깐 고찰해 볼 수 있다.)  단순히 유대인 출신 문학 작가라서 소수 문학의 대표작가가 아니다. 그 당시 체코 프라하에서는 독일어를 썼다. 다시 말해 대도시인 프라하 및 근교를 제외하고는 체코어를 썼다. (경계로 생각을 해 볼 때 자세히 생각을 해 본다면, 이디시어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슐레지엔, 모라비아, 그단스크 등의 단어들이 생각난다.)

게르만 혈통의 토종 독일인이 쓴 독문학 작품은 한국이라고 생각했다면 국문학 작품이지만, 체코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어로 문학작품을 썼다는 데에서 의미가 생긴다. 이는 우리의 사회와도 연결시켜볼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국가나 똑같이 드러나는 양상은 아니더라도, 이런 현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성을 띠는 것과 동시에 한 국가의 막강한 권력 아래에 소시민들이 겪는 차별이나 부당함을 더 자세히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본인의 작품들을 다 독일어로 썼다고 한다.


카프카 작품을 한 번만 읽고 이렇게 까지 해석해낼 수 있는 독자는 드물것이다. 이 기회에 카프카의 생애를 고려하며 변신을 한 번 더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변신, 카프카, 민음사




이 글은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들여 쓴 글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부끄러울 뿐이다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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