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쯤은 일 없지 않갔어.
수빈과 급식을 먹고 매점에 가고 하교를 하며 우리는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일상을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수빈이가 누구보다 편해졌고 수빈이도 그런 내가 더 편해진 눈치다.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웃었고 나는 수빈이에게만은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카레가 묻은 옷깃이 영 신경 쓰인다. 급식시간에 카레를 먹다가 방심했다. 이건 순전히 지나치게 맛있는 카레 때문이다. 카레가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대망의 그날은 아침을 굶고 가서 맛을 더 끌어올린다. 그럴 땐 어김없이 은주가 떠올랐다. 은주가 카레를 먹으며 만개한 봄꽃처럼 활짝 오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호기심 많고 똑똑한 은주는 분명히 카레가 인도음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빈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 야 나 오늘 학원 안 간다. "
" 기카믄 밀린 잠 좀 자라우. 눈밑에는 까맣고 얼굴이 그게 뭐이네. "
" 시험 때문에 잠을 못 자서 그래.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해. "
" 하루쯤은 일 없지 않갔어? "
" 그러다가 다 까먹는다니까. "
수빈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 애의 눈은 호기심으로 잔뜩 차 있었다.
" 우리 집에 같이 가서 영화 볼래? "
" 공부는 아이 하고? "
" 음, 잠깐이면 괜찮아. 일 없 습 네 다. "
" 그게 뭐이네 "
수빈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한참을 배를 잡으며 깔깔 웃었다. 나는 이런 수빈이가 참말 좋다.
" 그땐 정말 고마웠어, 네가 우리 할머니 발견해서 다행이다."
뒷목을 긁적였다. 사람들이 그날 이야기만 나오면 날 천사처럼 치켜세워줘서 민망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아이돌 같은 미소를 짓고 있고 싶은데, 내 표정은 구겨진 과자봉지 같다. 할머니이야기로 갑작스럽게 말수가 사라졌지만 우리는 곧 수빈이 집 앞에 도착했다. 할머니의 작은 구멍가게가 아닌 수빈이의 집은 처음이다. 수빈이가 사는 집이라니. 건물 앞에서 옷 교복을 탁탁 털어서 매무새를 단장하고 머리도 괜히 쓸어내렸다. 자랑스러울만한 좋은 동무가 되고 싶다. 진심으로
" 12층이야, 계단으로 가자. "
" 왜? 승강기가 있지 않니?”
" 그냥, 너 달리기 좋아한다며. 체력도 기를 겸. "
참 특이한 애였다. 12층을 어떻게 올라간담. 북에서는 전기가 차단되어서 승강기가 작동금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승강기가 있는 곳은 평양의 고위간부들이 사는 아파트이기 때문에 나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리고 북에서는 승강기 안에서 인사를 하는 승강이 언니들이 있었다. 수빈이에게 이야기를 해주며 계단을 오르니 금세 7층을 지났다. 숨이 차서 헉헉거릴 때 즈음 수빈은 현관문을 열었다.
" 할머니 다녀왔어요. "
수빈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진한 향수냄새가 코를 찔렀다. 널찍한 현관을 지나 우리 집 아니 아줌마집의 몇 배는 넓어 보이는 거실에 다다르자 새하얀 소파와 대리석의 테이블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빛을 발하며 소파 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 내가 말했잖아 그렇게 향수 많이 뿌리면 숨쉬기도 힘들고 폐에 안 좋을지도 모른다고. 창문은 왜 자꾸 닫는 거야? 환기시켜야 해 할머니. 좋은 공기 마셔야 빨리 낫지.”
할머니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수빈이는 익숙한 손길로 창문을 열더니 청정기를 가동했다. 그리고 대꾸 한번 없는 할머니의 굽혀진 다리를 펴주고 컵에 물을 따라서 할머니 앞에 놓아주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한없이 밖을 응시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수빈이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방으로 가자고 눈짓을 했다. 낯선 할머니옆을 지나 수빈이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할머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빈이방에 들어가니 향수냄새가 덜했다. 수빈이는 참 마음씀씀이가 남다르다. 할머니를 챙기자마자 주방으로 가서 가지런히 사과를 깎고 따뜻하게 떡을 데워왔다. 떡이라니... 사과를 집어먹으며 피식 웃음이 났다. 요즘 동무들은 간식으로 떡볶이나 빵 피자 과자 같은 걸 즐기지 않나. 떡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수빈이는 참 나만큼이나 요즘 아이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한테 친구집 왔다고 말 안 해도 돼?”
수빈이는 아줌마가 우리 엄마인 줄 아는 걸까? 하긴 내가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수빈이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걸까?
“수빈아 나는 오마니가 없어. 북에서 고아원에 살았어.”
수빈이는 고장 난 듯 눈이 동그래져서 할 말을 찾는 표정이다. 그런 수빈이에게 괜찮다는 느낌을 전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간식을 우적우적 집어먹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구랑 살아?”
“음.. 모르는 아주매. 나의 은인이야.”
“좋으신 분이다.. 나도 엄마 없이 살아.”
수빈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엄마가 예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 할머니는 내내 힘들어하시다가 그때의 충격으로 치매가 오셨어. 엄마가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계셔. 우리 집에서 나는 냄새도 엄마가 즐겨 뿌리던 향수인데 할머니가 백화점에 가서 몇 통씩 사 오시거든. 온 집에 뿌리고 또 뿌리며 엄마를 기억하려 애쓰시는 것 같아. 전에 찾아갔던 아파트도 할머니가 엄마랑 살던 곳이야. 할머니의 기억은 과거에 꽁꽁 묶여서 아무리 풀려고 해도 더 엉키고 말아. 어떡하면 좋을까?”
수빈이는 머리를 흩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수빈이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수빈이의 말을 들어주고 수빈이가 준 간식을 맛있게 먹고 수빈이가 할머니에게 갔을 때 창문을 닦고 어지러운 방을 정리하며 물티슈로 바닥을 닦았다. 금방 까매진 물티슈를 보며 닦아주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책상 위의 테이프를 잘라서 침대에 머리카락을 탁탁 붙였다.
밝고 용감하고 예쁜 수빈이에게 어둠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수빈이는 항상 집에서 예쁜 엄마가 반겨주며 구김살 하나 없이 자랐으니 늘 웃는 모습이 당연한 거라고 내 마음대로 단정 지었었다.
“북조선과 남조선은 참 다른 것 같아. 적응이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것 같아.”
긴 침묵 끝에 내가 꺼낸 말이다.
“같은 동포였으니 하나인 것도 맞지만 오랜 시간 동안 분단되어 있으니 다른 것도 맞지.”
“나랑 친해져도 나는 결국 탈북민인데. 나랑 같이 다니는 거이 불편하면 언제든 말하라우.”
수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야? 북한이랑 남한은 친해지면 안 되는 법이 있냐?”
“길티만 너 말고 다른 동무들은 다들 나를 경계하지않니. ”
“네가 탈북을 했다고 해서 바로 대한민국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았으면 해. 너의 가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거든. 나는 한 번도 네가 북한아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리고 호기심에 친해진 것은 더더욱 아니고. 난 사려 깊고 묵묵한 네가 좋았어. 넌 말이 많지 않지만 한번 말할 때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는 데 그거 몰랐지? 그리고 너 되게 귀여워. 특히 막 당황해서 실수할 때 표정이 킹받아.”
그 말을 하고 수빈이는 키득거렸다. 함께 한참을 웃다가 영화를 보았다. 그것이 서로에게 주는 가장 좋은 위로의 방식 같았다. 수빈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방문을 나섰다. 이제 이 동네 길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방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향수냄새. 어라. 할머니가 주방에 계신다.
“수빈이 친구가 와있었어? 아이고 간식 챙겨 줄 걸 그랬네. 방문이 닫혀있어서 몰랐지 뭐야”
할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요리를 하고 계셨다. 혹시 할머니가 돌아오신 건 아닐까 하며 내 얼굴을 일부러 가까이 보였지만 할머니는 처음 보는 아이처럼 대하셨다.
“다음에 또 놀러 오렴. ”
“안녕히 계세요.”
나는 웃음을 지으며 밝게 인사를 했다. 수빈은 굳이 1층까지 배웅하러 따라왔다.
“영애야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사실 집에 친구를 초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너랑 같이 있으면 편해서 할머니가 아픈 것도 감추지 않게 되고 뭐 그냥 좋다고!!!”
수빈이의 눈이 촉촉해진 것 같다. 나는 수빈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