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3. 할머니가 계시는 병원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by 예담




오늘 아침은 왠지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내 겉모습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고 좀 더 꾸미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딱히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나름 귀여운 아이의 거울 안에서 나를 쳐다본다. 볼살이 이렇게 통통했다니, 이건 다 아줌마의 요리솜씨 때문이다.


화장대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화장품과 크림에 쓰여있는 글귀를 얽어보며 용도를 짐작해 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읽는 것이 재미있다. 그래서 책이 없는 곳에서는 과자뒤에 쓰인 글도 영양정보도 다 재미있었다. 생소한 문장과 단어는 언제나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어머 너 뭐 하려고? 화장품이 궁금해?”


아줌마는 흥미롭다는 듯 나에게 다가왔다.


“립스틱.. 아니다. 립틴트도 있고 청소년용 화장품이 몇 개 있을 거야”


흥얼거리며 화장품을 찾은 아줌마는 입꼬리를 하늘 끝까지 올릴 기세로 웃는다. 청소년이 쓰는 화장품을 뜯지도 않고 왜 사놓은 걸까? 의아했지만 아줌마가 건넨 화장품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줌마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가뿐히 받을 만큼 우리는 친하니까.


등굣길에 수빈이를 만나서 함께 걸어갔다. 요즘 수빈이의 얼굴은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다. 곧 꺼질 촛불처럼 불안하게 일렁이는 수빈의 눈을 보며 할머니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치매가 오면서부터 호흡기 쪽도 예후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 중이시라고 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폐렴에 걸려서 위독해지셨다며 울먹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할머니가 집에 오면 뵈러 가겠다고 말하자 수빈이는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꽤 오랫동안... 아마 앞으로 평생 병원에 계셔야 할 거라고 했어. 지금 상태론 집에 혼자 두시면 위험하다고 했거든. 아빠도 일하러 가시니 없고, 내가 하루종일 옆에 있어 줄 수 있다고 했는 데... 의사 선생님이 아이는 안된데. “


”내가 무슨 아인가. 쳇. “


”기러게 말이야 쳇“


볼멘소리를 하는 수빈이를 따라 맞장구를 치며 손을 잡고 얼마 안 남은 교문을 향했다. 수빈이가 웃는다. 생각보다 할머니는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예쁜 웃음의 할머니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내가 할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의 마지막을 본 게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내 기억 속에는 단물을 건네며 환하게 웃던 할머니가 선명하다. 병실에서 온종일 누워 있을 할머니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라 바로 병원으로 갈 거라는 수빈이와 함께 할머니에게 간다. 버스를 타고 재잘거리며 밖의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 시간을 넘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오면서 다음에도 수빈이를 혼자 보내지 않고 꼭 같이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착한 곳은 큰 종합병원일줄 알았는 데 산속에 있는 나지막한 요양병원이었다.


할머니가 계시는 병실에 들어가자 향수냄새 대신 소독약냄새가 확 풍경 왔다. 병실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어서 특유의 냄새로 뒤덮여 있었다. 할머니는 역시나 창가 쪽 침대에서 창밖을 바로 보고 있었다. 할머니 옆으로 가자 가래 낀 숨소리가 들여왔다. 간간히 기침을 했는데 켁켁대며 힘들어하셨다.


”할머니 숨 쉬는 거 힘들어? 조금만 참아. 아니다. 참지 말고 말을 해줘 할머니. 가래를 뱉어야 되는데 잠깐만 기다려 할머니. “


수빈이는 대답이 없는 할머니에게 언제나 다정하게 많은 말을 한다. 또 혼자 말을 끝낸 수빈이는 간호사에게 달려갔다. 곧이어 간호사가 도구들을 챙겨 와서 할머니에게 끼운다. 가래를 혼자 뱉지 못하는 환자들은 간호사가 기구를 넣어서 가래를 빼낸다고 했다. 가래가 계속 쌓여있으면 노인들은 폐렴합병증므로 사망할 수 있기 때문에 잘 지켜봐야 한다고 수빈이는 말했다. 이어 호흡기 치료까지 능숙하게 도와주고 할머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았다.


할머니가 계속 같은 자세로 있으면 근육이 굳거나 피부가 안 좋아진다며 힘을 주어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며 할머니를 주물렀다. 나도 그런 수빈이를 따라 할머니를 주물렀다. 할머니는 간지러운지 이따금 몸을 비틀며 웃으셨는데 수빈이는 그런 반응에 눈물을 글썽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수빈이의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함께 할 수는 있다. 내가 은주를 잃었던 그날보다 더 클 수도 적을 수도 있지만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모두 같은 슬픔일 것이다.


부디 할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의 굳은 어깨를 주물렀다.


”우리 수빈이가 친구를 데려왔구나 “


할머니의 세상은 두 가지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간다. 할머니가 우현이를 기억하는 세상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기억을 심어드려야 할 순간이다.


" 할머니, 나 기억하지? 지수빈 "" 그래, 당연히 기억나지. 내가 널 왜 잊겠니? 우리 수빈이. 할미 똥강아지 "

할머니가 웃자 푹 파인 삼각형모양의 보조개가 예쁘게 피어났다. 그 웃음에 빗장이 풀리듯 수빈이도 곧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 이제 할미는 좀 자야겠다, 이상하게 잠이 온다. "


할머니가 잠이 들자 수빈이는 편의점으로 가서 딸기우유 2개를 사 왔다. 할머니 옆에서 쪽쪽 빨아먹는 그 간식이 그렇게나 맛있을 수 없었다. 정말로 할머니와 수빈이 곁에 오랫동안 남고 싶었다.


깜깜해지고도 한참 지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8시면 아줌마가 드라마 볼 시간이라 눈치를 챙기며 천천히 들어가려 했는데, 아줌마는 생각과 다르게 현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를 기다린 건가.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안도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매만졌다. 따듯한 손이 내 얼굴에 닿아서 추위에 오소소 솟았던 살결도 노곤함을 느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줌마는 파자마 차림이 아닌, 코트를 입고 있었다.


" 어디 갔었니.. 많이 걱정했잖아."


" 죄송해요. 친구랑 놀다 보니 시간이 어케 가는지 몰랐습네다."


아줌마에게 수빈이의 할머니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기 싫었다. 나의 일이라면 세상 끝까지 라도 갈듯이 설레발치는 아줌마와 아저씨를 보면 수빈이 할머니에게 찾아가고도 남아 보였다. 바쁘신 두 분께 공연히 걱정을 끼치긴 싫었다.


" 선생님 전화 오셨어. 내일은 꼭 테스트받자. "


"학원이요? "


실은 상관없었다. 딱히 고집부릴 이유도 없었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학원에 가면 다른 아이들처럼 높은 상가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고 수빈이와 같이 할머니 병원에 가주지 못한다. 로봇처럼 학원에 가서 늦게 돌아오는 것보다 길고양이처럼 혼자 자유롭게 누비고 싶었다. 하루종일 짜인 일정에 맞춰서 생활하는 것은 북에서 이골이 나게 해왔었다.


공부는 학교수업을 열심히 듣고 당분간은 집에서 혼자 해보겠다고 말씀드리니 아줌마는 예상했다는 듯이 알겠다며 종이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 너 핸드폰이 없잖니. 너희반 애들 다 가지고 있지 않니? 더구나 이번일을 보면 너에겐 손전화기가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네모나고 납작한 손전화기를 만져보니 반짝거리고 매끈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손전화가 아니라 아줌마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줌마 원래부터 여기 살았어요?"


"기렇지."


" 아줌마, 북조선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거이 널 위해서 꼼꼼히 공부한 거지.. "


아줌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나에게도 손전화가 생기다니. 하지만 내 집요한 생각은 아줌마의 당황하는 모습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정말이지 아줌마는 미묘하게 북한사람 말투와 비슷하다. 그래서 아줌마 옆에 있으면 아줌마의 말이 잘 알아들어진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다른 사람의 말에는 모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아줌마의 말은 잘 이해했던 사실도 의아했었다. 그땐 모든 것이 힘들어 따로 생각을 해볼 여지도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에게 큰 의미가 되어버린 아줌마가 궁금해졌다.


일기를 쓰고 막 잠을 청하려는데 방문이 열리고 아저씨가 들어왔다.


" 자고 있었니? 미안하다. 휴대폰 사용법 알려주려고. "


아저씨가 민망한 듯 뒷덜미를 긁더니 다시 나가려고 했다.


" 아닙네다. 알려주시라우. 내 궁금하던 참이었습네다.”


" 그래? "


아저씨는 반가운 기색으로 방안의 불을 환하게 키고 휴대폰 전원을 켰다. 갑자기 아저씨와 아줌마가 북조선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아저씨의 모든 행동들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궁금한 게 있는 데 물어봐도 되갔습네까?”


“물론이지.”


“아저씨는 고향이 어디입네까?”


“그게 궁금했니? 내 고향은 남쪽 끝에 있는 섬이란다. 멀지? 아저씨는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스무살때부터 섬에서 나와서 살게 되었단다. 다음 여행은 제주도로 정하자. 우리 한라산에도 가보자꾸나. ”


아저씨는 내가 관심을 가져준 것에 놀랍고 기쁜 표정으로 고향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해주셨다. 아저씨의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다행인건가? 아무튼 내가 꿈에서 깨며 소스라치게 놀랐던 그 상상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아저씨는 북조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줌마도 남조선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아줌마는 묘하게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 게다가 지난 번에 탈북에 대한 이야기를 한 날, 아줌마는 한참을 넋이 나가 있었다. 아줌마의 상처도 답을 찾지 못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2. 나의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