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망나니처럼 일하기
여기어때에 입사한 지 벌써 1년 반이 되었다. 2023년의 목표는 '나를 회사에 널리 알리자.'였고, 그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자신할 정도.
나를 알리기를 다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두가 알아야 내가 일하기 쉬워질 것이다.
2. 다른 사람이 내가 누군지 알면,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보다 내가 하는 일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일이 쉬워지고, 내 역할이 영향력 있어지고, 그러면 일에 대한 몰입과 즐거움이 생기는 선순환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목표를 달성할수록 팀 내, 센터 내에서 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이는 업무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나를 알리기 위해 어떤 것들을 할까 고민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하자.'였다.
˙오해 없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됩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피드백이 명확해집니다.
이전 회사와 여기어때에서 일하는 방법은 많이 달랐다. 빠르게 의사결정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서로 많은 이야기가 오감에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갔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이렇게 일할 수 있지? 가만 관찰해 보니,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숨김없이 그리고 '쓸데없는 필터' 없이 하는 것이 그 비결이었다.
일에 대한 본인 생각과 의견을 충분히 이야기한다. 미팅 시간뿐만 아니라, 밥 먹다가도, 커피챗을 요청해서도, 그냥 지나가는 말로도 본인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과정이 '오해 없이'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많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마련이고, 이야기 과정 중에 서로의 언어를 더 깊게 이해하며 명확한 문장으로 정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미팅에서 타이밍을 노리는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해도 될까?' 또는 ' 난 이런 생각인데, 지금 말하면 저 사람이 혹여 기분 상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으로 미팅에선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미팅이 끝난 뒤 내 의견을 다시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모두에게 다시 미팅을 요청하거나, 한 사람 한 사람 설득을 위해 리소스를 낭비해야 한다. 이 얼마나 시간낭비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쓸데없는 필터' 없이 이야기하게 된다. 쓸데없는 필터란 '죄송하지만', '지금도 너무 좋지만' 등 실제로 전달하기 위한 말 앞에 붙는 쿠션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케이(팀장님)와 1on1때 가장 먼저 한 말이 '직접적으로 피드백해 주세요.'였다. 날카로운 피드백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더 명확하고 더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곧 나의 성장으로 연결된다. 팀원들끼리 좋은 건 확실하게 좋다고, 부족한 부분은 확실하게 부족하다 전달하면 서로 윈윈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과정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된다. 내가 상대방에게 피드백할 때 ‘이 사람을 존중하기 때문에 더 좋은 방향으로’ 피드백하는 것이며 동일하게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피드백 또한 ‘관심과 존중’이 바탕에 이루어져 있다는 것. 잊지 말자
˙나의 장점으로 캐릭터를 만들면 곧 내 영향력이 됩니다.
˙라포 형성이 빠르니 미팅 진행도 수월해집니다.
업무에서 잘할 수 있는 일과, 업무 외로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업무에서 내가 맡은 바를 잘하는 것도 중요한데, 내가 인간으로서 어떤 것을 잘할 수 있는지 잘 고민하고 그 부분을 강화해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소위 나대야 한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서양화과 입학을 위해 순수예술 입시 공부를 했었다. 그림을 남들보다 잘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 디자이너가 디자인 툴을 잘 다루는 것이 당연하듯, 리서처가 말을 조리 있고 명확하게 해 나가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그림을 잘 그리는 리서처는? 팀원들의 얼굴을 피그잼에서 뚝딱 그려낼 수 있는 리서처는? 리서처가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지만 '잘 그린 그림'으로 나의 잘남을 어필하긴 충분하다.
나의 잘남을 업무 속에 녹여낼 수 있다면 더 좋다. 리서치 결과를 시각화하기 위함이라던가, 컬처팀(사내 문화 조성 팀)에서 간단한 디자인을 돕는다던가, 혹은 퇴사하는 팀원의 얼굴을 그려준다던가.
이렇게 캐릭터를 만들다 보면 나에 대한 어필이 쉬워진다. 위에서 말한 '하고 싶은 말을 잘하는' 소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소냐에 더해 독특한 캐릭터를 갖게 되고, 남들은 나를 기억하기 쉬워진다. 존재감 없는 사람과 존재감 넘치는 사람이 동시에 같은 일을 할 때, 사람들은 누굴 더 기억하게 될까? 물론 일을 잘하는 사람이 회사 입장에서는 더 중요하지만 비슷한 퍼포먼스를 내는 사람 중에서는 독특한-활발한-눈에 띄는 사람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나를 기억해 주니 리서처의 업무에서는 나를 찾게 되는 '내 영향력'을 갖게 된다.
내가 어떤 업무를 하는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상태에서 미팅을 진행하면 미팅 진행도 쉽다. 리서치 진행을 위해 이해관계자(PO, 디자이너)와 킥오프를 진행할 때 이들은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미리 고민하게 된다. 내가 어떤 업무를 하는지, 어떤 일을 잘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은 더 넓고 깊어진다. 실제로 입사 초반에는 리서처들이 준비한 내용만 전달했다면 최근은 '이런 질문해도 될까요?'에서 '리서치 진행이 이렇게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런 방법으로도 가능할까요?'로 좀 더 발전해나가고 있다. 디자이너나 PO가 리서치 방법론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스크립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궁금해하는 등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훨씬 질 좋은 리서치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나 혼자만의 노력은 아니며 앞서 사내 리서치 성숙도에 대한 기반을 닦아준 욘, 라, 주(리서처)의 도움이 크다.
이런 과정은 나를 유쾌하고, 분위기를 잘 이끌며, 업무에 활기를 불어넣는 사람으로 평가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충분히 어필이 되었기 때문에 타인의 오해도 훨씬 줄어들고, 간혹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용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내가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 방어가 되기도, 무기가 되기도 한다.
요즘 '망나니팀'이라고 팀 소개를 하는데, 아직 본모습을 다 비치지 못한 분들이 빠르게 팀에 적응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농담 삼아 망나니라고 하지만 충분히 나대고 충분히 어필하고 충분히 하고 싶은 말을 다 전달했으면 좋겠다. 물론 나 또한.
여태껏 나는 회사에 맞는 페르소나를 입고 다녔다. 다른 사람의 결에 맞게 나를 맞춰 나간다는 것은 일도, 회사에서 인간관계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여기 어때 CXlab의 팀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수많은 자기 개발서-일과 관련된 책에서 필자들은 일을 잘하려면 일을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은 사랑이 가능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 사랑이 배가 된다. 한 번 사랑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실수도 사랑으로 감싸주고, 서로의 든든한 편이 되어주고, 미워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조금 과장을 보태 부모 자식 간 절대적 사랑의 형태를 띄우게 된다. (미우나 고우나 퇴사 전까진 함께할 사람들이니)
나의 본모습을 충분히 인정해 주며 존중해 주는 내 팀을, 팀에서 하는 내 일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