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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목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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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ojeong Apr 03. 2021

4. 좁은문

"여기는 기숙사생이 몇 명이지? 손들어볼래?"


나를 포함 6명이 손을 들었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한자려니, 하는 우리를 위해 한문 선생님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셨는데, 오늘은 기숙사를 소재로 삼으신 듯했다.


"수경아, 기숙사 입구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아니?"

"모르겠어요."

"영진이는 아니?"

"아니요."

"기숙사 입구에는 '목련관(木蓮館)'이라고 한자로 적혀있단다. 다들 학교 정문에 목련꽃 만개한 거 봤니? 목련은 우리 학교 교화이기도 한데..."


금화여고는 가파른 경사 위 고지대에 지어졌다. 오르막 길을 따라서 한참을 걸어야 교문이 나타났고, 헐떡이는 숨을 고르느라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 따위는 절대 주지 않았다. 그러니 만개한 목련꽃을 봤다며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목련이라.. 나도 목련꽃은 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무엇이 목련인지를 몰랐으니, 본 건지, 안 본 건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교실 창문 밖으로 꽃이 핀 나무가 있는지 훝어보다가, 학교 정중앙에 있는 초록빛 잔디 운동장을 응시했다. 처음 기숙사에 왔던 날, 잔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걷던 순간이 떠올랐다.   


기숙사 건물에서 나와서 교실 건물로 들어서기까지 이동 거리는 여섯 발자국에 불과하다. 십 초도 안 걸리는 통학시간은 기숙사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숙사에 살면서부터 틈만나면 졸아댔다. 기면증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특히 수업종은 최면에 가까웠다. 종소리에 침만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낫지, 나는 아예 정신줄을 놓아 버리기 일쑤였다.


"영진아, 어디 아프니?"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1교시부터 엎어져 자는 염치없는 인간에게 이토록 다정하다니. 이럴 땐 얼마나 솔직해도 되는지 몰라 대답할 수 없었다.


"영진아, 1층 양호실에서 잠깐 쉬는 건 어떠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내게 선생님은 쉬고 오라고 했다.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양호실을 권유받으니 순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순 없었다. 잠깐 쉬고 수업에 복귀하면 아무 문제없는 거니까.


"영진아, 밥 먹으러 가자!"

수경이었다. 주변을 보니 양호실 침대에 누워있는 건 나뿐이었다. '맙소사.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지?' 사라진 시간을 더듬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있잖아, 있지.."

수경이는 무슨 말이 하고 싶으면 '있잖아'부터 꺼낸다. 처음에는 뭐가 있다는 건가 의아했는데 이젠 익숙해진 수경이의 말 습관이었다.


"어, 뭔데?"

수경이의 말에 반응해주며 빨리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보챘다.  


"너 동아리 하지 안을래? 아는 선배가 나보고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문학 동아리야. 일 년에 한 번 시화전도 한다더라. 선배 말이라 알겠다고는 했는데 혼자 가긴 조금 그렇기도 하고.. 어때? 같이 하면?"  

"글쎄. 난 그다지."

"하긴, 그 문학동아리 2학년 기숙사 선배들도 몇 명 있어서 불편할 수 있어.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2학년 누구?"

"있잖아, 2학년 간부 강민정, 이다영 선배."

"의외네, 그 사람들. 감수성이 영 메말라 보이던데."

"혹시 모르잖아. 이번 기회에 좀 친해질 수도 있고. 그럼 세탁기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수경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기숙사 선배들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수험생이 되면 성적과 관계없이 모두 예민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는 최대한 3학년 눈에 띄지 않은 게 중요했다. 휴게실, 시청각실 같은 공유공간은 말만 공유지 3학년의 전유물이었고 세탁기도 마찬가지다. 3학년이 없을 때는 2학년이 그 모든 걸 차지했다. 누구는 밥 먹는 시간도 아껴서 공부한다던데 나는 끼니를 거르고 틈틈이 밀린 손빨래를 해야 했다.


"그거 어떻게 가입하는 건데? 너한테 말하면 되는 거야?"

"응응. 내가 선배한테 말해서 가입서 받아 올게."


수경이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나는 잘한 짓인지 몰라서 웃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본 적 없던 나는 정신없이 날라오는 새로운 자극들을 주워 담기 바빴다.   


"좁은문이야."

"뭐가?"

수경이의 말에 나는 되물었다.


"동아리 이름 말이야. 좁은문이라고."

"웃기다, 무슨 이름이 그래? 의미가 있는 거야?"

"몰라. 다음에 물어보면 알겠지. 빨리 밥먹으러 가자."


수경이는 관심 없어 보였지만, 나는 곧 합류할 동아리 이름이 신경 쓰였다. 이름 따라간다고 대문처럼 크고 잘 열리는 문이 아니라, 좁고 삐그덕거리면 어쩌나 그런 걱정이 들었다가 괜한 생각 같아 얼른 떨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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