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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ojeong Feb 02. 2021

3. 위악

13살에 데뷔해 세계적인 가수가 된 보아에게는 죄가 없다. 보아가 어찌 알겠나. 자신의 데뷔곡이 한창 잠 많을 여고생들을 깨우는 기상나팔로 쓰일 줄을.. 그러니 보아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하나로 담긴 세상! connecting is my naverland! 추카추카추! 이젠 멈출 수가 없어요오오~"


어둑어둑한 새벽 6시, 보아의 노래가 시끄럽게 방마다 울려 퍼졌다. 내리 며칠째 같은 노래인데 적응은커녕 나의 심장박동은 점점 더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그 느낌이 끔찍이도 싫었는지, 오늘은 노래가 나오기도 전에 스스로 눈을 떴다. 예고된 공포에 노출된 나의 뇌가 나름 똑똑한 방어기제를 발휘한 듯했다.


"...아침점호 인원 보고. 총원 98명, 열외 1명, 현재원 97명. 이상 보고 끝. 번호!"

 

2학년 장은 사감을 향해 준비한 말을 마친 뒤, 우리 쪽을 쳐다봤다. 첫 번째 점호자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감지하고 입을 뗐다.

 

"하, 하나."

"두울"

"셋."

"난가? 넷!"  


아뿔싸, 내 순서가 분명한데 쓸데없는 말이 앞에 튀어나왔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고 싶은 나의 개그 본능이 눈치도 없이 꿈틀거린 듯했다. 지켜보던 2학년 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다섯."

"여, 여섯."  

"야! 1학년 똑바로 안 해?"

 

맞은편에 있던 3학년 선배 하나가 많이 참았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자세를 곧게 세웠다. 에라이, 고작 한소리 들었다고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내 몸이 못마땅했다. 나를 포함해서 군기가 바짝 든 차렷 자세의 동기들을 보니 입학을 한 건지, 입소를 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다시 해." 뒷짐 지고 있던 사감이 마이크를 꺼내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번호."  2학년 장이 바로 응답했다.


"하, 하나."

"둘."


"다시." 사감이 짧게 말했다.

"번호!"


반복을 거듭할수록 숫자와 숫자 사이의 틈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순번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마치 계주 선수가 된 것처럼 나를 향해 달려오는 바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기울였다.


점호 속도는 확연히 빨라졌다. 급기야 화음처럼 숫자들이 겹치기도 했다. 기대 이상의 과몰입 결과였다. 화음의 당사자들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이상, 아침 점호를 마친다."


사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곧 아침 급식 시간이었지만 사력을 다한 나는 아침밥을 포기하고 다시 잠들었다.




"영진아 매점 갈래? 나도 아침 안 먹었거든." 수경이었다.

"잘됐다. 같이 가!" 반가운 제안이었다. 자극적인 MSG 맛을 떠올리니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1층 매점으로 달려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기만 했을 뿐인데, 매점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쉬는 시간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덜 익은 면을 풀어헤치며 와그작 씹기 시작했다.


"영진아, 왜 그래? 뭔데?"

"아, 고개 돌리지 마. 뒤쪽에 기숙사 선배들 있어."

"그래? 몇 학년?"

"2학년. 아침에 앞에서 말하던 장인가 뭔가 같은데."

"강민정 선배 말이지?"

"이름은 모르는데. 넌 어떻게 알아?"

"같은 중학교였어."

"그렇구나. 수경아, 저 선배는 항상 표정이 저따구야?"


내가 생각해도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수경이는 왜 묻는지 안다는 듯이 항상 무표정한 것은 아니며 종종 웃기도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강민정 선배의 웃는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매번 수긍보다 의문을 먼저 내뱉는 사람이었고, 그런 질문을 환영해 줄 만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쾅쾅'

노크와 동시에 기숙사 문이 활짝 열렸다.


"나영진. 잠깐 나 좀 보자."

"네."


나는 2학년 장이 부르는 위치로 걸어갔다.


"내일 기숙사 간부 모임 있으니까 참석해. 사감 선생님도 오시는 자리야."


무슨 자리인지, 왜 모이는지 묻고 싶었으나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까로 문장을 완성해서 말하는게 부담이기도 했고,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적극적인 참여의사로 비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이거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더 늦기 전에 간부 임명을 철회해 달라고, 나는 간부고 뭐고 싫고 관심없다고, 억지로 나를 시키면 기숙사는 망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보기와 달리 아주 게으르고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같았다. 이런 발언 계획을 세우고 나니, 간부 모임이 몹시 기다려졌다.


모임 장소는 학교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시내였다. 시내를 가는 건 처음이라 어느 식당으로 가는지 궁금하고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뒤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금세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쪼그라드렀다. 더군다나 입에 붙지도 않는 '다나까'로 말해야 하니, 이동 중에도 외운 문장들을 다시 점검하고 연습했다.


"먹고 싶은 걸로 골라봐. 계산은 내가 할 거니까."

상석에 앉은 사감이 양쪽으로 나눠 앉은 1, 2학년을 번갈아보았다. 나는 얻어먹을 염치가 없기도 하고 준비한 말을 언제 내뱉을지 계산하느라 여러모로 가시방석이었다.


"돈가스 정식 6개에, 나영진만 고르면 되나?"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인가?' 준비한 말을 마치면, 어디로 퇴장해야 할지 출구 방향을 살폈다.


"여긴 돈가스가 맛있어."

성격 급한 사감은 호출벨을 눌러 돈가스 정식 7개를 주문했다.


"서로들 인사해. 아직은 누가 누군지도 서로 모르지?"

"저는 1학년 나영진입니다."

"저는 1학년 부장 김은미입니다."

"저는 1학년 총무 이영애입니다."


"나는 2학년 장이고, 이름은 강민정."

"나는 부장이고, 이다영이야."

"나는 총무고, 박진희."


이름 앞에 간부 직책을 붙이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 그걸 눈치챈 사람도 나뿐인 거 같았다.


“기숙사는 연초에 이렇게 간부들끼리 상견례를 가지는 게 전통이야. 앞으로 서로 협력할 일들도 많을 테니 가깝게 지내. 1학년들은 궁금한 거 있으면 2학년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기숙사 전통이라..' 학교 홈페이지에서 읽었던 기숙사 생활규칙에는 학년별 간부도, 상견례도 언급이 없었는데, 기숙사 전통이란 코너가 따로 있는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전에 나와 같이 간부로 지목받은 은미와 영애에게 진짜로 간부를 맡아서  생각인지 물어본 적이 었다. < 어쩌겠어그냥 하면 되겠지> 그녀들의 대답은 놀라웠고, 왜 나만 거부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이 많아졌다. 앞으로 3  발목 잡히는 봉사직인데, 순순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은미와 영애가 신기하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2학년들의 얼굴을 한 명씩 차례 대로 살펴보았다. 이들도 자기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걸까? 아니면 거부했으나 빠져나가지 못한 걸까? 나는 이들이 어쩌다 여기 앉아있는 된 건지 궁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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