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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ojeong Jan 19. 2021

2. 법칙

이해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하고.
고개 숙이고 싶지 않아도 숙여야 하며.
참고 싶지 않아도 참아야 하는 것.

이것이 우리 기숙사의 법칙입니다. 동시에 사는 방법이기도 하죠.






'내가 방금 보고 들은 건 대체 뭘까?'


바닥에 차갑게 가라앉은 무거운 공기를 발로 밀어내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해되지 않던 3학년들의 요구사항을 하나씩 복기하다가 '다나까'를 쓰라고 윽박지르던 장면이 떠올라 입술을 터트리며 웃었다.


'휴, 아무도 못 봤다'


황급히 주위를 살피며 새어나온 웃음을 감추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사감실이 눈에 들어왔다. 절대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는 이 소란을 묵인하고, 방에서 태연히 쉬고 있을 사감을 생각하니, 이거 어쩌면 방조범이 아니라 교사범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사감은 뭐하는 사람이지? 간부가 필요하면 그렇다고 설명을 하고 투표로 뽑아야지, 왜 3학년이 누가 해라 마라 명령이야?’


내가 간부로 지명되지 않았다면 갖지 않았을 불만이고, 질문이었다. 지금껏 신경 쓸 필요 없었던 것들인데, 이번에는 내가 떠맡아 고민하게 된 기분이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집합 소리에 뛰쳐나가 고개 숙이고 서 있어야 될지 가늠이 안 되었다. 



입학식이 있던 날, 체육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기숙사 내부를 구경했던 것이 생각났다. 대부분 부모님과 함께였고, 나처럼 혼자인 경우도 있었다.


 "여기는 공용 세탁실입니다. 세탁기와 탈수기가 있어서 누구나 쉽게 빨래할 수 있습니다."


갓 고등학생이 된 우리 중에 빨래를 해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부모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체육 선생님은 능숙하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 학교 체육 과목을 담당하면서 기숙사 운영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것은 따로 저에게 연락 주시고요. 기숙사 생활은 여자 사감 선생님이 24시간 함께 상주하면서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여기가 사감실입니다." 


체육 선생님은 사감실을 노크했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키 큰 여성이 문을 열고 나왔다. 


"네. 기숙사 사감 박미란입니다.“ 

"미란 씨, 여기 신입생들 왔으니까 방이랑 자습실 안내해 주세요.“


사감은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엽전꾸러미 같이 생긴 열쇠뭉치를 들고 나왔다. 


"침대마다 개인 사물함이 있으니, 돈 같은 귀중품은 이 안에 보관하고 자물쇠로 잠그면 됩니다. 자물쇠는 각자 챙겨 오는 거구요. 분실물이 없도록 하세요."


환영의 인사말보다 당부의 말을 먼저 꺼내는 사감이었다. 상투적인 말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낯선 곳에 던져진 신입생들에게 사무적인 태도로 말하는 사감이 차갑게 느껴졌다. 


"들어와서 보셔도 됩니다. 2층 침대를 쓰게 되고요. 한 방에 10명씩 공동생활을 합니다."


침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공용이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침대뿐이라는 말이었다. 



진학 상담을 하던 날, 담임 선생님은 내 앞으로 카탈로그 한 권을 내미셨다. 보통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집에서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런 나의 속마음을 아셨는지, 그저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탈로그 속의 고등학교는 집에서 꽤나 멀리 있었다.


"영진아, 네 성적이면 이 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 기숙사 비용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거 가져가서 보고 생각해봐."


담임 선생님께 너무 감사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제격인 진학 조건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돈 많이 드는 기숙사 생활을 찬성할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말도 꺼내보지 못한 고민을 이제는 맘 편히 시작해도 되었다. 그것도 제법 괜찮은 명목으로.



오늘 기숙사에서 맞닥뜨린 정체 모를 시련과 불안의 원인을 찾으려 진학 상담의 순간까지 샅샅이 살폈으나 만족스런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일단 자고 내일 더 고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침대에 누워있던 친구들이 벌떡 일어나 문 쪽을 쳐다봤다. 집합의 여운이 크게 남아있었던지 2층 침대를 쓰는 친구 하나는 급히 바닥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그런 서로의 모습이 너무 등신 같고 어처구니 없어서 다같이 웃기 시작했다.  


"영진! 너 1반이지?" 수경이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 어." 나는 대답했다.

"나도 1반이야."

"알지. 같은 반인데."


수경이는 통학할 수 없는 거리라 기숙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내일 아침에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나머지 깨워주기로 하자."

"그래. 꼭 깨워주자."  


나는 대답을 마치고, 2층의 침대 자리로 올라갔다. 침대에 붙어있는 사다리는 수직으로 설치되어 있어 마치 암벽등반을 하는 것처럼 내 체중을 고스란히 견디며 올라야 했다. 오늘따라 불친절한 사다리 각도가 이 기숙사랑 잘 어울려 보였다.  


"난 내 세상이 있죠. Peace B is my network ID. 우린 달라요! 갈 수 없는 세계는 없죠오오~"


다음날, 기상을 알리는 보아의 노래가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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