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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로 Feb 22. 2022

여자라는 이유로

이름 모를 잡초의 생명력이 더 감동이다.

2월의 우중충한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나락으로 끌어당긴다. 사람의 감정이 바윗덩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날에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각자가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기도 하지만, 정처 없이 길을 떠나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치는 막연한 시간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에서 휘날리며 떨어지는 눈들이 내 몸을 더듬는 것 같아서 얼른 건물로 들어섰다. 퀘퀘한 냄새가 베여있는 계단 위 2층에서 고소하고 달달한 커피 향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발로는 퀘퀘한 계단을 딛고, 코로는 달콤한 커피 향에 이끌려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선 곳이 다방이었다.


다방 안에는 1985년 한정선이 작사·작곡하고 솔개트리오가 부른 ‘여인’이라는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30년 전으로 떠나고 있었다. 멜로디와 노래 가사가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 노래였다.     

바람에 취해버린 꽃처럼 
가로등 위에 있었죠 
여인이여 내려치는 빗물을 
어떻게 막으셨나요      
어제는 밤거리에 홀로 선 
그림자를 바라보았죠 
여인이여 비에 젖은 창문을 
왜 닫으셨나요     
그댄 왜 긴긴밤을 
한 번도 창가에서 
기대 서있는 모습이 
내게 보이질 않나 
왜 잊으셨나요           

신발, 의류, 피혁 같은 경공업 산업에서 조선, 차량, 건설업 등 중공업 산업으로 전환되었던 1970~1980년대는 산업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던 시기이다. 모두가 ‘잘 살아보자’는 구호로 농촌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했고, 도시에서는 산업화의 물결로 금성, 삼성, 대우, 현대, 성경그룹 같은 대기업이 출현했다. 1980년대는 노동자의 인권보다 국가 경제의 부흥이 우선이었고, 국민의 주권보다 국가 안보가 우선이었던 시절이었다. 암흑가에서는 밤의 대통령이 생겨났고, 밤을 지배하는 자들이 낮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란 말은 진리가 되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사람들의 머리로 쏟아진다. 수원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술집의 간판이 어두운 밤거리를 형형색색으로 수놓고 있었다. 왼손 엄지손가락에 약간의 장애가 있는 A양은 21살이다. 전에는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를 하면서 직책까지 맡았지만 한 순간의 운명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수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찌르며 괴롭히던 재봉틀 바늘보다 더 미운 아버지 때문이다. 놀음판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유치장으로 간 아버지를 빼내기 위해서 A양의 전 재산에다 100만 원의 빚까지 진 것이다. 피해자와 합의를 하기 위해서 부족한 돈 100만 원을 수원에 살고 있는 고향 언니에게 부탁한 것이다. 언니는 가게에 와서 한 달만 일 해달라면서 100만 원을 가불 해줬다. A양의 고향 언니는 수원에서 잘 나가는 술집 마담이었다.

    

당시 고급스러운 술집은 조직폭력배들의 자금 출처였다. 나이트클럽, 룸살롱, 스탠드바 같은 곳에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깡패들이 조직을 이루어 영업점의 술과 여자를 관리했다. 조폭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으며 때로는 비굴하게 권력에 아부하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조직폭력배의 영향력을 받는 술집에서 일을 하면,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살 수가 없었다. 암흑가의 황태자처럼 살고 싶은 깡패들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거나 돈 버는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밍크코트 위에 솜털 같은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술집들의 레온 사인 때문에 눈송이의 색깔을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펑펑 내리는 눈송이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얀 눈이 쌓인 길 위를 휘청거리면서 걸어가는 A양의 밍크코트가 겨울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21살에 시작한 술집 생활을 31살이 되도록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A양은 3녀 2남 중 셋째이다. 위로는 오빠 둘이 있고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다. 오빠들은 공부한답시고 서울과 대전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고 넷째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막내 동생은 중학교 3학년이니 돈 들어갈 곳이 많다. A양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을 다니며 생활비를 보태었지만 아버지의 술버릇 때문에 결국은 술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사연으로 술집과 다방으로 오게 된 여성들이 참 많았던 시절이었다.

    

회사에서 부당한 처우를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나 돈이 필요한 여성들이 술집으로 들어오면 선불을 준다. 여성들이 거절할 수 없는 좋은 화장품과 예쁜 옷을 사라고 돈을 가불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들을 붙잡기 위한 방법이었다. 100%의 대출이자와 선이자, 꺾기 수법 등 기막힌 공제 수단을 동원해서 연약한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 있었다. 이것저것 공제하다 보면 월급은 적고 가불 한 돈은 눈덩어리처럼 불어나서 결국은 여성 스스로가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희박하지만, 여기에서 악착같이 정신 차리고 일해서 빚을 갚고 돈을 버는 여성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포자기를 하고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되다. 그러면 술집 사장은 여종업원의 몸매나 얼굴에 따라 돈을 받고 다방이나 사창가로 넘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옷과 화장품 값 그리고 생활비로 100만 원을 받고 흥청망청 살다 보면 1년 후 다른 곳으로 팔려 갈 때는 20배 이상 늘어난 2천만 원 이상 되는 것이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은 더 밝고 색은 더 아름답다. 밤의 불빛들이 휘황찬란하게 피어나는 것은 아름다운 여성들의 꿈이 가연물(可燃物)이 된 까닭일 것이다. 누가 술집이나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그녀들에 부모의 가난이, 한 여성의 소중한 삶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국민들의 이기주의 때문이며 이는 국가의 책임이다. 


'커피 드실래요?' '중년의 허스키하고 매혹스러운 목소리가 나의 시간여행을 멈추었다. 스텐 쟁반에 놓인 회색빛 사기잔에 누런 보리차가 출렁거린다. 나에게 들이대는 사기잔에 시간의 때가 묻어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담의 얼굴에 색조와 대비되는 어색한 화장이 웃음으로 가득하다. '커피 두 잔 주세요'하자 요염한 미소로 답하면서 주방으로 향한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되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행복을 일구어야 할 여인의 삶에 달콤한 커피 향으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방 창문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한 줄기가 마담의 빰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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