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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Jan 17. 2024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픈

This is Me #1 _프리랜서14년차를 소개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관광청 홍보영상_한국어 더빙_Claire Kim

공채(KBS, EBS, 애니채널 등의 방송국에 채용돼서 활동하는 성우들) 성우가 아닌, 주로 작은

녹음실과 온라인등에서 일을 받아 녹음해서 보내는 인디성우로 일한 지 십 년이 넘었다. 


나는 국내의 TV광고나, 방송국 라디오 광고에 내 목소리가 노출되기보단,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단 점을 활용해서 글로벌 채널 여기저기에서 일을 받는다. 지금까지 미국, 영국, 러시아, 인도, 독일, 중국, 벨기에 등등 온라인으로 만난 고객들에게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녹음을 보냈다. 그 수백 개의 녹음 프로젝트 중, 손에 꼽히는 큰 녹음 건이자, 가장 마음고생을 많이 하게 한, 내 성우 경력에 가장 아픈 손가락이 돼 버린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2020년 4월쯤, 두바이의 한 광고 에이전시에서 메일이 왔다.

사우디 아라비아 관광청 공식 홍쓸 한국어 더빙 작업에 참여할 생각이 있냐고, 온라인 플랫폼에 게재된 내 보이스 샘플을 클라이언트가 최종 선택했다는 것이다. 


Fiverr 같은 글로벌 프리랜서 사이트등에 뿌린 내 보이스 샘플 중 하나가, 두바이까지 

가 닿았다는 게 신기하고 희한하기도 하고 녹음비가 얼마가 되었든 무조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멋진 프로젝트에 선정이 돼서 영광이다, 계약서를 보내주면 당장 사인해서 보내겠다'등등

가슴은 기대감으로 쿵쾅대지만, 이런 오퍼쯤 많이 받아봤다는 허세를 가장한 메일을 보내고 견적을 물어보는 메일이 오고 갔다.  얼굴 한번 못 보고, 오로지 이메일로만 계약이 오고 가는 온라인 작업의 특성상,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상대가 믿을 만한 회사인지 파트너인지 확인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며칠간 구글에서 박박 캐낸 정보에 의하면, 내게 접촉한 두바이의 K****** Film이라는 에이전시는 중동의 대규모 광고 프로젝트를 수주한 꽤 큰 회사였고 나의 담당자는 클라우디아라는 우아한 이름의 (그때까지는) 친절한 여자 디렉터였다. 


게다가, 큰 회사답게 5년 이상의 현지 TV, 라디오광고 노출 사용료까지 지불하겠다며 (더빙된 작업물을 영구히 사용하는걸 perpetuity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됨) 1분짜리 광고를 녹음하는데 사용료가 $800 USD, 녹음료가 $300 USD로 총 1100달러를 지급받게 되었다.  이 광고건 이전에는, 사실 녹음의 '사용범위'에 따른 견적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생각지 않은 '권리'를 상기시켜준 이번 녹음에 가슴이 점점 부풀어져 갔다. 


광고주로부터 비슷한 느낌으로 녹음해 달라고 전달받은 영어로 된 영상 원본은 아라비아의 신비한 이야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색채가 뚝뚝 떨어지는 몽환적이면서도 듣고 있음 귀가 간지럽게 살랑거리는 영어 톤이었다. 

그 톤과 비슷하게 해 보려고,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톤에서 높은 톤까지 버전을 5개쯤 만들어서 보냈다. “아라비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우디”이 마지막 문장은 50개에서, 4개쯤으로 줄여서 보낸 것이다. 


다행히 별 다른 수정 요구 없이 녹음은 끝이 났고, 1달이 지난 뒤 내 Paypal계정에 계약서에 찍힌 액수 그대로 입금된 걸 확인하고 너무나 뿌듯하고 신이 났었다. 한국어로 된 영상 버전은 그 뒤로도 유튜브에 올라오지 않아서 최종 결과물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관광청의 그 누구에게라도 닿았을 거란 상상을 하며 지냈다. 


그리고 1년 뒤, 2021년 또 다른 중동의 에이전시에게서 메일이 왔다. 똑같은 콘셉트의 사우디아라비아 관광청 홍보 영상물을 자신들이 맡았다며, 기존에 작업했던 성우가 맞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작년 두바이의 한 에이전시에서 진행했었는데, 새로운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절차적 확인을 한 뒤, 또 한정 없이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똑같은 콘셉트의 거의 달라지지 않은 대사의 영상에 더빙을 하는 건, 처음보다 더 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에이전시와의 계약도, 녹음료 송금도 우려와 달리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거짓말같이 4월 초에 맨 처음 나를 찾았던 두바이 에이전시의 담당자가 다시 메일을 보내왔다. 2022년 버전을 자기들이 하게 됐다고, 예전과 똑같이 작업해 줄 수 있냐고. 모든 것이 그때까진 다 순조로웠다. 이미 2년 전에 작업을 했던 회사였고, 담당자도 디렉터 클라우디아 그대로였다. 녹음 의뢰를 받고 하루 만에 작업해서 보낸 후, 몇 번의 수정이 오고 갔지만 그때까진 담당자와 의사소통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녹음을 보내고 일주일 넘게 답장이 없긴 했지만, 원래 중동사람들이 느리니까, 바쁜 일이 생겼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인보이스를 제출하고도 한 달이 넘도록 담당자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2년 전 메일을 뒤져 참조로 달렸던 메일 주소의 주인과,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이메일 주소로 클라우디아가 연락이 없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고 싶다. 라며 메일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두 달이 넘도록 나는 아무런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급여를 받지 못한 경우가 많진 않았다. 그러나, 경험 상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내가 그냥 해주는 것과 약속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내가 하는 일은, 목소리와 감정으로 내 혼을 실어 보내는 것인데, 그 모든 가치가 다 무시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부분이 망가진 채, 다음 일에 내 역량의 100%를 발휘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성우로 하는 일의 대부분이 온라인의 보이지 않는 얼굴의 고객과 이뤄지는데, 이렇게 상대가 잠수를 타는 경우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이번 두바이 건 외에도, 미국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녹음만 받고 잠수를 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활동하는 몇몇 사이트에 ‘판매자’(성우)들의 포럼이 있는데 ‘온라인 신문고’ 같은 용도로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알리겠다고, 통보했다. 나는 가끔 플랫폼 운영자들에게 adviser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내가 성우 union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름칠을 좀 한 다음, 잠수 탄 그들에게 “나는 너와 너희 회사가 가진 reputation에 악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네가 계속 이렇게 내 메일을 무시하고 전화도 안 받으면 지금 이 상황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라고 메일을 보낸 것이다. 


그 미국 스튜디오는 한 달간, 나를 무시하다, 며칠 뒤 바로 변명하는 메일이 왔고 바로 입금이 되었다.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일이 이 정도로 마무리되는 것도 천만다행이다 싶게, 그동안 나는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대처를 해왔다. 그런데 이번 두바이 에이전시의 담당자는 퇴사를 한 건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연락이 안 된 지 3달이 다 되어갈 때쯤, 검색하다 불현듯 중동의 ‘라마단’ 기간이 생각났고 긴긴 휴가를 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2년 전 받은 첫 메일에 그녀의 휴대폰 번호가 있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나는 부랴부랴 왓츠앱에서 그녀의 휴대폰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거의 포기를 한 심정으로 보낸 메시지가 1시간 뒤 읽었단 표시가 떴고, 그녀는 내 예상대로 라마단 휴가를 갔었다고 말했다. 나는, 2달 넘게 답장이 없어서 걱정을 했었다고, 미안하지만 아직도 녹음비가 결재가 안되었다고 본론을 얘기했다. 그녀는, 자기가 다시 알아보겠다며 일주일 안에는 처리가 되도록 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 러. 나. 


그 뒤 3주가 지나도록 나는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해결되지 않은 이 일 때문에 가슴 한편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그동안 속 끓인 시간과 더불어 3주 전 보내겠다고 한 약속도 지키지 않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클라우디아, 당신에겐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지난 3달간 나는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 계속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산업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알리는 등, 나름의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메시지를 쓰는 동안, 사실 손이 떨렸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때부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경험상 외국인들은 좋은 일로 음성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음성 메시지에는, 두바이 사막을 걷다 흥분해서 녹음을 했는지, 바람 소리가 휘몰아치는데, 화가 잔뜩 나서 흥분한 담당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지금 나와 우리 회사에게 협박을 한 거다. 나한테 이런 모욕을 줄 수는 없다. 녹음료 지불이 늦어진 건 내 잘못이 아니다. 회계팀에서 착오가 있었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모욕적인 얘길 들어야 하냐, 너는 지금 후회할 짓을 한 거다.’ 등등…

나는, 마음이 쑥대밭이 되었다. 내가 조급해서 일을 그르쳤나, 3달간 잠수를 탄걸 문화적 차이로 이해해야 했나, 이제 이 에이전시와도 3년간 해온, 사우디 관광청 프로젝트도 끝이구나…


그리고 이틀 뒤, 정확한 금액이 입금이 되었다. 

전 세계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녹음을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내가 직접 광고주를 만날 일이 없는 중개 플랫폼에서 대부분 일이 이뤄지지만, 일대일로 일을 하게 될 경우, 별의별 일이 다 생기게 된다. 국제기구와 여러 회사의 해외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나름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렇게 얼룩진 결말을 맞이할 일이 생길 줄 몰랐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받는 보상이 금전적인 사겠도 있지만, 고객이나 광고주가 안 좋은 피드백을 할 일이 안 생기게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되면서 ‘관계’를 망쳐버렸다는 자책감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더 참았어야 했는지… 그러나, 3달이 넘게 이메일에 단 한 번도 답변을 하지 않은 담당자가 내가 저렇게 얘길 하지 않았다면 과연 비용처리를 제대로 했을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내가 참았더라면 2023년 사우디 영상을 다시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3년으로 끝날 운명이었을까… 하나마나한 ‘인생극장’ A, B를 혼자 생쑈를 하며 머릿속으로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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