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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Feb 23. 2024

AI 일자리 빼앗는 휴먼 되기

This Is Me #5_프리랜서 14년 차를 소개합니다._국제행사 MC


유난히 기억에 남는 행사 2탄!


AI로 대체될 직업 군으로 통역, 번역사는 빼놓지 않고 언급된다. 실제로 1차 초벌 번역은 챗GPT가 해주고, 2차 검수나 오류 수정 등만 전문 인력의 몫이 된 지 오래다. AI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내가 하는 일도 이 '불편한 동거'의 줄타기를 잘하거나 아니면 기술에 잠식될 거란 불안을 늘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2023년 6월, '휴먼'인 내가 AI의 역할을 해야 하는 행사가 나에게 왔다. '서울국제트래블마트'란 타이틀을 달고 매년 서울시에서 전 세계 관광업계 종사자들을 초청해서, 한국의 업체들과 수출 박람회를 여는 행사인데 개막식을 '미래 지향적', '초연결 디지털 미래사회'느낌이 팍팍 나는 동대문 DDP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동대문 DDP자체만으로도 미래 지향적인 건축 디자인이지만, 행사가 열리는 콘퍼런스 룸 전체 무대를 최첨단 미래 지향적인 분위기로 꾸미고, 1부 개막식 사회자를 'AI 가이드' (이름도 있다. '서우리')가 진행하는 행사가 돼버렸다. 애초에, 나에게 MC기회가 주어진 것도 국제행사를 진행하는 한국어, 영어 MC이자 성우로도 일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AI목소리의 톤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고민을 좀 하다가 몇 개의 샘플을 보냈고 최종 선택이 되었다. 나는 AI의 페르소나를 지닌 '휴먼'이 되어서 대본의 첫 문장을 아래처럼 짱짱하게 외쳤다.  


"SEOUL, MY SOUL!

  ‘2023 서울국제트래블마트’ 개막식에 오신 여러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밤 여러분의 서울을 

  더욱 소울풀하게 만들어 드릴 ‘서울관광 AI 사회자’ 서우리 에요!"

1부에서 AI인 나는,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에 무대 뒤편 오디오 콘솔 옆에서 아주 작은 램프등에 의지해 어둠 속에서 AI흉내를 내었다. 이번 행사는 특이하게도 축사, 환영사등 VIP 분들이 등장할 때 빼고는 모든 순서가 준비된 영상이 이끌어가는 콘셉트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그걸 소개하는 AI목소리도 오차없이 '컴퓨터'처럼 나와야 했다. 그래서, 이 모든 세부 순서, 프로그램을 초단위로 쪼개는 등, 행사 전날부터 당일까지 리허설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도, 에이전시도 리허설을 반복하다가 차라리 녹음을 해서 트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지만 현장에서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는데, 변동 사항을 그 자리에서 녹음해서 틀 수는 없으니 '덜' AI 스럽더라도 라이브로 진행하게 되었다. AI를 흉내 내는 인간이다 보니 '이렇게도 진행하는구나'싶어, 참으로 새롭기도, 신기하기도, 고되기도 한 경험이었다 


VIP인 서울 시장님이 등장하는 큐사인에 맞춰서, 시장님 등장을 알려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띤 '서우리'(나)는 목에 담이 올 정도까지 행사 총괄 피디님만 쳐다보면서 행사를 진행했다. 사실, 이번 행사는 VIP등장과 환영사만 사고 없이 진행되면 80% 이상은 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실수하면 나도 에이전시도 다음은 없단 말이었다. 사실 나는 전날 대학병원에서 이석증 때문에 이석 치환술을 받고 구토에, 어지럼증에 행사 당일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하지만 아프기 훨씬 전에 계약한 행사를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으니, 타이레놀과 어지럼증 약을 잔뜩 털어 넣고, 무대에서 쓰러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선 자리였다. 


긴장한 탓인지, 십 년 넘은 행사 진행으로 이골이 났는지, 아님 기도 덕인지, 다행히 1부의 '서우리'는 떨어지는 톤을 가까스로 멱살 잡듯이 끌어올리며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를 외치고 퇴장했다. 

그리고 2부, 해외에서 참석한 외국인 바이어들, 게스트들을 위한 환영 만찬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 정체를 들킬 수 없는 AI신분이었던 나는 2부 무대 위에서 '행운의 뽑기'를 진행하면서 참가자들을 소개하는 휴먼 MC가 되었다. 한국의 street food, 분식을 주제로 차려진 2부 뷔페음식은 떡볶이, 맥주를 즐기는 참가자들 덕에 금방 동이 났다. 2부가 끝날 때쯤, 두통과 어지럼증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휴먼 MC인 나는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를 무사히 한번 더 외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오후 3시부터 리허설을 시작한 행사는 밤 8시 반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다행히 나는 무대에서 기절하지 않았고, 주린 배와 사정없이 댕댕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동대문 쉑쉑 버거를 먹으며 생각했다. 오늘 나의 역할은, 'AI를 위협할 만한 것이었나?'. 행사 14년 차, 나의 마지막 자존심은 'AI와의 경쟁'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이번 행사가 마지막이 된다고 할지라도, 매번 최선을 다한다는 것, 내게 기회를 준 사람들과의 신의를 천금같이 생각하는 것, 그것 만큼은 2백 년 뒤 진화한 AI라도 못할 일이니까. 입안이 깔깔해 정작 버거는 먹지도 못하고, 감자튀김에 케첩을 잔뜩 뿌리면서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AI 일자리 한번 뺏어본 행사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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