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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Mar 16. 2024

통역은 페로몬샤워젤의 향기를 타고

This Is Me #8 _영어통역

This Is Me #8 _프리랜서 14년 차를 소개합니다._영어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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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은 페로몬샤워젤의 향기를 타고>

통역이란 것은, 작정하고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하지 않는 한 통역을 했던 순간을 기억하기가 어렵다.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통역을 하면서 녹화, 녹음을 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몇 번 시도하다가 정신 사나워져서 그 뒤론 아예 할 생각을 접었다. 그리곤,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점점  남루해지고 통역비 입금과 동시에 머릿속에선 없던 일이 되곤 한다.

그런데, 통역을 하고 가끔 '전리품'처럼 기념품이나 선물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 선물이 썩지 않고 두고두고 쓰는 물건이면 그걸 볼 때마다 통역을 했던 순간이 안 떠오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성인용품 샵'에서 파는 '페로몬 타입 샤워젤' 같은 것 말이다.

2년 전쯤, 국내에서 성인용품 총판을 하신다는 한 대표님이 통역을 의뢰하셨다. 처음엔 메신저로 업종을 얘기하셨을 때부터 적당히 자를 생각이었는데 (온라인에 변태진상은 차고 넘치는 고로..) 시종일관 나에게 진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셨고 무엇보다 미팅 어젠다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서 보내셨는데 '일'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풍기는 오라가 느껴졌다. 물론 미팅 내내 실적, 제품 얘기만 하지 내가 걱정할만한 민망한 주제의 그 어떤 것도 얘기하지 않는다고 계속 강조하시긴 했다. ㅎㅎ 메신저 너머로 내 표정이 어떨지 이미 다 보이시는 듯했다.
 
통역할 대상은 이탈리아 출신의, 알베르토란 이름을 가진, Satisfier라고 하는 전 세계 2위 성인용품 제조업체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세일즈 총책임자라고 했다. 이번에 이분이 한국에 와서 오전에는 총판계약관계와 영업, 마케팅, 홍보 전략 등을 정리하고 오후에는 종로와 강남에 있는 성인용품 매장을 직접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통역하기로 한 D-day는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나는 이분의 이름과 회사 외엔 어떤 정보도 주어진 게 없었다. 구글과 인터넷엔 이분의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알베르토가 직설적이고, 터프하며, 이탈리안 억양이 강한 영어를 쓰고, 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제조사의 보스라는 정보만 가지고 유튜브에 떠도는 이탈리아인의 영어 영상을 계속 들었다.

그리고 팔자에 없는 전 세계 성인용품 시장규모와, 업계 트렌드, 한국 성인용품시장의 특성 등등 졸지에 성인용품시장 현황을 일주일 내내 머리에 쑤셔 넣고 명동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탈리아인 게다가, 성인용품판매업체는 난생처음이라 명동으로 가는 동안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오전에 있을 매출 관련 미팅도 문제지만, 오후에 종로, 강남역 주변에 있는 성인용품매장을 돌아다닌다는데, 내가 통역할 일은 별로 없을 거라고 해도, 40년 사는 동안, 가 볼 곳이라고 상상도 못 해본 성인용품 매장에서 내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빈속에 아이스 라테를 들이부었다.

약속 장소인 공유오피스에 일찍 도착한 내가, 로비에서 카페인 충전을 하고 있는 동안 크지 않은 로비에 딱 한대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리고 큰 키에, 스키니 청바지,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니트를 멋스럽게 착장 하고, 검은색 가죽과 실버가 섞인 팔찌, 파르라니 짧게 깎은 머리, 바버샵에서 관리받은 듯한 구레나룻 와 턱수염, 레이저가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눈에 이 모든 이미지의 화룡점정을 찍는 회색과 검은색이 오묘하게 섞인 사자 눈썹을 휘날리며 중년의 외국인 남자가 나타났다.

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탈리아 신흥 마피아 조직의 보스 같은 이 카리스마 철철 흐르는 잘생긴 중년의 남자가 그 '알베르토'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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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분이 로비 쪽으로 나오자 나도 모르게, 긴장감에 벌떡 일어나 먼저 ‘당신이 알베르토 맞냐, 나는 이번 미팅을 통역할 사람이다’,라고 후루룩 소개를 내뱉었다. 얼굴엔 닳고 닳은 영업모드 미소를 띠고서 말이다.

그리고 3인실 좁은 회의실에서 드디어 전쟁 같은 미팅이 시작되었다.
나는 미팅을 시작하자마자 지난 일주일간 내가 외우다시피 한 이탈리아인이 출연하는 동영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과, 한국 대표님이 알베르토를 왜 그렇게 어려워하시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알베르토는 Adult Shop을 '아드르뚜노 쑙'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 자기 영어는 형편없다며, 이탈리아어 억양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으나, 한 2시간 지나고 나니 그 억양에 또 적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분의 얼굴에서 풍기는 느낌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 대표님이 미팅 전 나에게, 본인은 잘못한 게 없는데 알베르토랑 얘기만 하고 나면 자꾸만 '혼나는'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정말로 그랬다.

대표님의 말을 영어로 옮기고 난 뒤, 알베르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2~3초의 침묵의 시간 동안 나를 쏘아보는 알베르토의 불타는 눈빛에, 기억도 안 나는 3살 때 잘못까지 빌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나를 고용한 대표님 편에 서서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대표님의 입장을 전달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미팅 이후, 본사와의 실제 계약관계는 내가 통제할 수 없겠지만, 미팅하는 동안만큼이라도 한국인 대표님에게 거의 빙의되다시피 해서,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동양인 차별 같은 건 꿈도 못 꾸게, 더 프로페셔널한 매너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드디어 3시간의 마라톤 미팅이 끝나고, 매장 투어 전에 점심 식사를 같이 하면서 알베르토가 한국에서 2년 반 정도 살았었고,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이탈리아인 '알베르토'와도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토가 한국에 사는 동안 제일 좋아했던 음식인 된장찌개와 불고기 전골을 같이 먹는 동안 우린 한결 편해졌고, 드디어 성인용품 판매매장투어를 하는 통역 2차전이 시작되었다.

투어가 시작되자, 처음엔 매장에 전시된 제품이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인지도 몰라서 민망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제품을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에 대해 매장 매니저와 얘기가 길어질수록 제품을 자세히 이해하게 되고 타사와의 기능(?)을 비교하는 통역을 하면서 자꾸 헛기침이 나오고, 혼자만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인 대표님이나 알베르토나, 취급하는 물품이 단지 성인용품일 뿐 한국 소비자들이 자신의 제품을 어떻게 하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을까 아이디어를 쥐어짜는 건 다른 사업가들과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알베르토가 ‘한국에서는 성인용품 구매자 중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이라서, 여성 소비자들의 ‘취향’과 의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게 큰 문제’라며 한국 매장에서 제일 잘 팔린다는 ‘물품’을 나에게 보여줬는데, 나는 제일 잘 나간다는 제품의 괴. 랄. 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디자인(과 크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곤, 알베르토가 저렇게 핏대세우고 얘기할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였다.     

3시간 동안, 매장 투어를 다니며 내가 본 알베르토와 한국인 대표님의 모습은 성인용품 시장에만 적용되는 여러 가지 법적 제재, 예를 들면 온라인 성인용품 샵에서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는 등의 문제와 성인용품매장을 터부시 하는 문화등 한국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하는 자신의 일에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방문이었던, 강남에서 가장 큰 성인용품 매장(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규모일 것이다)인 R매장을 둘러보면서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가끔 지나다니던 강남역 뒤쪽 골목길에 이렇게 큰 성인용품 지하 매장이 있을 줄이야.

그러나 사실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그 넓은 매장을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민망한 제품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태도였다. 매니저라고 적힌 명찰 아래 자신의 이름 석자를 걸고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시던 그 매장의 매니저분은 신제품을 소개하게 돼서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 같아 보였다. 나는 손님이 아니라, 미팅에 따라왔을 뿐인데 나에게도 어찌나 친절하게 대해 주시던지, ‘기. 념. 품’까지 챙겨주셨다.

사실, 제조업체 통역을 할 때면, 기념품이나 선물로 각 회사의 제품을 주실 때가 있는데, ‘스머커즈’라는 식품 회사 총판 통역을 할 때는 견과류 스낵 세트를 받아서 딸아이들과 행복하게 먹었다. 이번에도 제조 업체인데, 업종이 성인용품…-_-;; 통역 자체도 골머리가 아팠지만, 혹시나 ‘뭐라도’ 주실까 봐 매장 투어 내내 덜덜 떨면서 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님은 나에게 기념품으로 각 잡힌 핑크색 선물 종이백에, 자신의 명함과 정성스레 포장된 각기 다른 향의 ‘페로몬’ 샤워젤 2개를 안겨 주셨다.  

사양할 새도 없이, 한국인 대표님께서 ‘성인용품 제품은 일반 화장품 원료보다 훨씬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좋은 원료를 쓴다’며 가서 ‘잘’ 쓰시라’고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잔뜩 담긴 진지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표정이 어찌나 근엄해 보였던지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집에 고이 모셔왔다.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는 훨씬 ‘얌전’한 선물인 게 어디냐며 내심 안도하면서 말이다.

마지막 매장투어를 끝으로, 마피아 보스의 포스를 풍기던 이탈리아인 알베르토와 헤어지게 되었다. 하루 종일을 같이 보내고 나니, 알베르토와 꽤 친해져서 다시 만나면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길 무렵, 알베르토가, '오늘 잘해줘서 진심으로 너무 고마웠다며, 너는 확실히 언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다음에 꼭 다시 보자' 며 악수를 건넸다.

12월, 추운 겨울에 만난 성인용품업계라는 새로운 세계.

성인용품의 이미지 때문에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쉽게 진입하지 못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라 시작하게 됐다는 패기 충만한 젊은 한국인 대표님과 한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카리스마로 업계 1위를 향해 돌진하는 이탈리아 아시아 태평양 총책임자, 그리고 업종이 무엇이든 생업의 현장에서 자부심과 확신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내가 통역이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계와 도전을 접하면서 나는 매번 선물을 받는 느낌이다. 나의 좁은 세계와 지경이 그들로 인해 넓어지고 옹졸한 편견이 깨지는 특혜 같은 선물 말이다.

통역을 준비하는 사전 작업과 현장에서의 긴장, 대치관계는 늘 어렵다. 완벽한 통역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실수를 하면 그 후유증이 오래간다. 지난번 식품회사 두바이 바이어 통역 건처럼 말이다. 그래서, 통역의 기술이나 완벽함보다 나는, 통역을 의뢰한 대표님들의 마음이 돼보려고 애를 쓴다. 계약을 따내고자 하는 절실함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으니까.
  
매번 이렇게 전쟁 같은 통역이 끝나고 나면 나에겐 ‘사람’이 남는다. 계약이 잘 안 풀려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고, ‘대표님’과 같은 마인드로 한다는 내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게 된 많은 ‘대표님들’이 남는다. 그리고 기념품도.

선물로 받은 그 ‘페로몬향 샤워젤’은 우리 집 안방 샤워실에 고이 모셔놨다. 처음에 나는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 찬 눈초리로 샤워 젤을 노려보다가 쓰게 됐는데, 내가 예상했던 그런 ‘음흉한’ 냄새는 없고 프리지어 향에 가까운 제품이었다. ㅋㅋㅋㅋ

일하면서 받은 많은 기념품 중, 먹어서 없어진 것들은 통역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샤워젤은 가끔 기분 전환할 때 쓰는데 쓸 때마다 이 제품을 건네던 성인용품 매장 매니저님의 자부심과 친절함이 생각난다.

아, 물론 알베르토의 사자 눈썹도…  
  

<에필로그>

그리고, 한 달 뒤 한국 대표님으로부터 한번 더 연락이 왔다. 알베르토와 미팅을 한번 더 하게 됐는데 가능하시냐고..

이번엔, 지난번처럼 쫄지 않으리라, 안 신던 하이힐까지 신고 가오를 잔뜩 잡고 나간 통역자리에 알베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코로나에 걸려 못 온 알베르토 대신 그의 부하직원이 왔지만, 나는 끝판 왕이 나와야 할 게임 마지막 스테이지에 시스템 오류로 개구리왕자가 등장한 것 마냥 김이 새 버렸다.

하지만 한국 대표님의 패기와 열정으로 그분의 회사는 시장 점유율이 계속 상승했고, 한 달 전, 알베르토와 미팅 이후 제조사와의 관계도 좋아져서 제품 수급도 훨씬 수월해지셨다고 했다.

대표님 사업의 건승을 빌면서, 나는 다음 끝판 왕을 만날 준비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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