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his Is M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aire Kim Mar 25. 2024

<B전무와 러브레터>

This Is Me #9_프리랜서 14년차를 소개합니다._영어PT코칭



행사진행, 영어PT발표외에도,(요즘엔 잘안(못)하지만) 코칭을 하던 시절 겪은 에피소드입니다. 이번글이9회차이니, 이제 This Is Me 10회중 마지막 에피소드가 남았네요. 댓글로 응원해주시면 마지막 힘 쥐어짜서 보답하겠습니다. (굽신굽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Y사의 영업부서 B전무를 처음 만난 건 3년전쯤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글로벌 IT기업의 ‘전무’님이 영어PT코칭을 받고 싶다고 플랫폼에서 나를 찾았을 때, 이 일을 할지 말지 제일 고민이 되었던 것은, 이분이 ‘전무님’이란 사실이었다.

S전자를 그만 둔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뒤로 이직한 곳도 S전자의 조직문화와는 정반대되는 곳으로만 찾아 다녔는데, 말단 피래미 ‘사원’으로 끝나버린 나의 대기업 체험기는 ‘임원’ PTSD를 남기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나는 S전자에서 임원을 ‘보좌’하는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별을 단’ 그분 들을 둘러싼 생태계가 얼마나 살벌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번 일을 거절하면 그 다음 일이 없는’ 프리랜서 신분이니까, 그리고 10년이나 지났으니 내 안에도 나름의 근육이 생겼으리라 ‘믿고 싶은’ 깜냥으로 B전무님을 만나러 갔다.

강남역의 한 스터디 까페에서 만난 B전무님은 내 예상과 달리,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댄디한 느낌의 40대 중반의 남자분이셨다. 학부까지 미국에서 다니고 졸업했지만, 국내 영업만 담당하다가 영어는 전혀 쓸 일이 없었는데 몇 주 후에 아시아태평양관할 사장에게 보고를 할 일이 생겨서 아주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한국지사의 대표는 자기가 꽉! 잡고 있기에 걱정할 일이 없는데 (-_-) 미국인인 CEO에게 자기가 한국지사 대표로 실적보고를 하기로 해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회사는 손꼽히는 글로벌 IT기업이지만, 이분은 한국의 금융권을 대상으로 제품과 솔루션을 판매하는게 맡은 업무라서 사실 주말에는 골프로 영업하고 주중에는 술자리에서 접대하는게 전부이다. 그동안 쓸 일도 없고 쓰고 싶지도 않은 영어로 발표를 하라고 해서 아주 곤란해 보이긴했다.

 그렇지만, 분명히 회사에 인하우스 통번역사도 있고, 영어 잘 하는 사람이 발에 채일텐데, 굳이 전무님이 직접 ‘과외’를 받아가며 발표를 해야하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보니, 회사에서도 이 전무님이 영어하는 걸 본 사람이 없고, 자기 밑에 42명을 호령하는 별을 단 ‘우두머리’가 직원들에게 따로 부탁하는 것 자체가 이 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B전무님은 회사 일이긴 한데, 회사일이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이 되어서 자신의 사비를 털어 나와 10번 가량을 만나 발표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 B전무님 이전에 내가 영어 발표 코칭을 했던 분들은 아주 다양한 직군의 고객들이었다. S사의 수석연구원인데, 해외 컨퍼런스에서 신제품 디자인 발표를 하시는 분, 금융계에 일하면서 이직할 회사의 인터뷰 준비를 하시는 분, 일본 아마존 fulfillment center를 담당하면서 분기 보고를 해야 하는 한국인 대리님 등등 회사원에서 대학교 도서관 사서, 교직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나의 영어PT 코칭은, 적게는 두 번, 많게는 5번정도까지 미팅을 하면서 발표자료를 계속 수정하고 연습을 시키고, 매번 자신의 발표 모습을 촬영하고 피드백을 주는 형식이었다.

그 많은 사례들 중 1차, 2차까지 이어지면서 10번이나 하게 된 코칭은 B전무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나의 임원 ‘PTSD’는 정점을 찍었다.

나의 B전무님은, 언제나 운전을 하면서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문자를 보낼 시간도 없거니와, 운전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늘 다른 업무로 통화를 하거나 회의에 매달려 있으니 아마도 나에게 발표와 관련해서 ‘의논’할 시간은 이동할 때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의논’도 '전무님 지시사항’이 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호칭은 꼬박 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셨으나, 발표 날짜가 다가 올 수록, 존댓말도 아닌 것이, 반말도 아닌 듯한 말투로 나에게 발표 ‘자료’수정을 지시할 때가 많아졌다.

원래 영어PT코칭을 하는 나의 역할은 말 그대로 영어발표를 코칭 해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완성된 영문PT자료에, 최소한 1차 번역이 끝난 영문 스크립트가 있어야 거기서 논리와 표현을 다듬고, ‘발.표.’ 연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에서 제일 바쁘신 나의 B전무님은, 한국어로도 스크립트를 쓸 시간이 없어서 회사에서 그나마 만만한 부하직원에게 한국어 스크립트를 작성해서 나에게 보내라고 하셨고, 나는 그걸 번역해서 B전무님께 확인과 검사를 받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그러니까, 영어발표 delivery를 코칭 해주던 나의 역할은 회사 경쟁구도와 실적압박에 쩔은 한국 중년 아재의 하소연 들어주는 ‘번역가’가 된 셈이었다. 사실 고백 하건데, 나는 그 때 ‘번역가’의 탈을 쓴 말단 ‘대리’의 영혼이었다.

자주 만날 시간이 안되니, 한번 만날 때 회사 근처의 스터디 카페를 빌려서 4시간씩 발표 자료를 수정하고 영문 스크립트를 만드는 동안 처음엔 나를 ‘부려’먹는 듯한 태도의 B전무님이 회사에서 늘 ‘시키는’역할에만 익숙한 권위적인 임원이라서 내가 고객님을 잘못 만난 탓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B전무님이 영업실적을 어떻게 포장해서 말할 것인가 나에게 토로하는 동안 10년전 다녔던 S전자 녹봉을 받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B전무님이 거느리고 있는 부장, 차장, 과장도 아닌 대리 4년차쯤 되어서 X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윗 분’들이 좋아할 만한 표현과 단어를 골라 ‘이게 좋을까요 저게 좋을까요’를 연발하며 영작을 해댔다.

 B전무님은, 처음엔 내가 영어전공도 아닌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찰떡 같이 알아듣는걸 신기해 하셨다. 그러다 나중엔, 나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나올 정도로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대리 4년차의 ‘익숙한’ 굽신 모드가 느껴졌을 것이다.

전혀 모르던 업종의 배경과 부연설명을 들으면서 80페이지가 넘는 PT자료의 영문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동안 나는 10년전 내가 왜, 한국의 전형적인 조직생활을 못 견디고 뛰쳐나왔는가를 절절하게 곱씹게 되었다. 그리고 ‘존엄한’ 프리랜서가 되고 싶어 그 모험을 감수했는데도,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조직의 말단 사원의 ‘굽신’모드가 뼈저리게 싫고, 약이 올랐다.

밤마다 자기 전 ‘나는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 , ‘정신과 자존심을 챙겨야 한다’고 속으로 오조오억번 외쳤지만, 다음 날 휴대폰에 B전무님의 이름이 뜨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전화를 받고 상냥함을 가장한 비굴모드로 대답을 하는 자신이 말도 못하게 미웠다.
그러던 어느 날…
---------------------------2부----------------------------
밤 11시에도 추가 자료를 메일로 보냈다는 문자와 약속시간을 바꾸거나, 미팅 장소가 바뀌었다며 ‘운전 하면서 거는’ 통화가 수십 번 쌓일 때 즘, 갑자기 발표 날짜가 바뀌었다며 하루 온 종일 시간이 되냐고 연락이 왔다.

4시간도 힘든데,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B전무님과 영어자료를 들고 씨름 할 생각을 하니 도망가고 싶었지만 ‘아니오, 못합니다’를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머릿 속 나의 모습과 달리 내 입은 ‘아…네네,,, 언제가 괜찮으실까요…?’를 내뱉고 있었다.ㅠㅠ

약속장소인 역삼역 근처 스터디 카페로 가면서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진짜로 이번이 마지막 수업이다’, ‘다음에 연락이 오면 다른 일이 생겨서 못한다고 말해야지’를 꾹꾹 눌러 삼켰다.

아…그런데, 스터디 카페는 평일인데도 무슨 일인지 룸이 다 차서 2인용 제일 작은 방 외에는 자리가 없었다. 노트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겨우 들어가는 창문도 없는 좁은 스터디룸에 나는 B전무님과 붙어서, 한국은행의 금리인하가 다음분기 금융권 실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고객의 데이터 이전에 소요되는 시간과 불편을 단축시키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아시아태평양 CEO의 입맛에 맞게 작성했다.

오전 내내 씨름을 하고 점심시간이 되자, 하늘색 캐주얼한 면 자켓과 어울리는 로퍼를 신은 B전무님은, 세련된 옷차림과 달리 나에게 근처 맛있는 해장국집이 있다며, 애초에 나에겐 메뉴 선택권 따윈 존재하지 않은 양 나를 데리고 갔다.

원피스를 입어서 신발 벗고 들어가 앉는 자리가 불편한 나는 엉거주춤 앉아 있었는데, 해장국이 나오자 나에게 ‘다대기’좀 팍팍 넣으라며 권하는 B전무님 소매 깃 사이에 보이는 명품 시계가 왠지 우스워 보였다.

이 분을 알게 된지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자, 나는 내가 이 사람을 힘들어하는 이유가 나의 노예 근성 때문인지, 권위와 ‘대접 받는 일’만 익숙한 B전무의 네가지 없는 애티튜드 때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단 생각만 점점 더 강해졌다.

목구멍으로 들어갔는지, 똥구멍으로 들어갔는지 모를 해장국을 먹은 이후 2차전이 시작되었다.

아… 밥을 먹은 이후, 이 B전무님은 식후 땡이 아니라 긴장이 되는 건지, 거의 20분에 한번씩 나가서 담배를 피워댔다. 거기다 회사에선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다.

전화를 받으러 나가면서 얼핏 들은 그 분의 말투는,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조직맞춤형 ‘소시오패스’의 그것이었다.

내가 10년전 S전자에 다닐 때, 임원이 되는 것을 ‘별을 단다’라고 빗대서 말했는데 그 ‘별을 단’ 사람들 중 몸에 암 덩어리 하나 쯤 안 키운 사람이 없단 말이 있었다.

입사한지 갓 1년 지난 피래미 사원인 내 눈에도 맨 정신과 정상적인 패턴으로는 도저히 임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그런 임원이 ‘임시직원’의 준말이라고, 저렇게 영혼을 갈아가며 조직에 충성해봤자 재계약 되지 않아 잘리고 나면 남는건 암 덩어리 뿐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며 신나게 사표를 던졌다.

내가 다닌 회사 중 제일 큰 규모의 숨막히는 조직 문화를 1년 8개월 동안 경험한 이후, 프리랜서가 된 나는 그 특유의 조직맞춤형 ‘소시오패스’를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시 사항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문제가 생겼다는 부하직원의 전화를 받는 B전무의 말투에서 나는 이 사람이 젊은 나이에 전무를 달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순식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B전무는 전화 받을 겸 나간 김에 담배를 피고 돌아 온 것이 역력한 냄새를 훅 끼치며 스터디룸에 들어섰다. 이 아저씨와 노트북 사이에 팔이 닿을 정도로 좁아터진 미팅 룸에서 발표준비를 한 지 6시간이 흘렀다. B전무의 옷에 밴 담배 냄새에 머리가 아픈 건지, 세 잔째 마신 커피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모를 때쯤 집에 멀쩡한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있는 내가, 이 중년 아저씨랑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인가, 현타가 왔다.
노트북을 옮기다 어쩌다 손이 닿았을 때는 평소에 생각도 안 나는 남편 이름을 부를 뻔했다.

오후 5시, 미팅이 끝나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서 집에 온 나는, 바로 견적서를 작성했다. 내가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속성 번역’이란 항목에 넣고 싶었으나 B전무가 눈을 부라리며 뭐라고 할까 봐 떨치지 못한 노예 근성과 안 봐도 되는 눈치를 보며 옹색한 견적서 항목을 채웠다.

결국 우주에서 제일 바쁜 B전무님은, 영어 PT 코칭으로 날 만난게 아니라, 자기가 던지는 한국말을 영어로 받아서 스크립트를 완성해주는 용도로 날 써먹으셨고, 정작 본인이 영어로 발표를 하는 건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채 (그래서 나는 이분의 영어 발음이 어떠했는지 아직도 알길이 없다.) 나에게 자신이 발표해야할 미국인 CEO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 란 안 어울리는 엄살을 남기고 사라지셨다. (뭥미...)

견적서를 보내고, 2틀 뒤 바로 입금이 되었다. B전무님의 이름 석 자를 선명히 찍은 입금 내역을 보며 나는 내가 작성한 견적서 내역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10건의 미팅 동안 내가 작성한 번역, 미팅 외 밤 1시 2시까지 작업한 내용 등 숫자로 표기할 수 있는 건 영혼까지 끌어다 다 작성한 듯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자존심과 일 사이의 줄다리기 스트레스는 어디에도 담을 곳이 없었다.

 심지어 한 소리 들을까 봐 생각한 만큼 비용을 청구하지도 못했다. 판교에 사신다는, 명품 시계를 찬 전무의 용돈 사정을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회사 일인데 자기 돈으로 코칭비를 입금하는 순간에 빈정이 상하면 어떡하나, 그게 내 수준이었다.

십 년 전에도, 내가 하고 싶은, 잘하는 일로 당당하게 인정받고 ‘존엄하게’ 일을 하는 자유로운 ‘노동자’ 신분이 되고자 했었다. 프리하기만 한 허울좋은 프리랜서가 안 되려고 이렇게 용을 쓰고 저렇게 눈치를 보며 버틴 십 년의 시간 뒤 나에게 남은 건 이 견적서 세 장이다.

견적서를 노려보면서 다짐했다. 나의 모든 자존심과 가치를 물량화, 산술화 해서 담을 수 있는게 이것 밖에 없다면 다음엔 나를 위한 ‘러브레터’ 수준으로 항목을 채우겠노라고.

역설적으로 B사감 대신, B전무 덕에 산산이 부서진 자존심을 그러모으며,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녹음해서 보내 준 영어 발표를 잘 했는지 어쨌는지 역시나 그 어떤 피드백도 인사도 없던 B전무의 휴대폰 번호를 검색했다.

나의 손가락은 천천히, 움찔 움찔 대며 ‘차단’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바뀌고,  

전화가 왔다.


B전무에게서.
……………………………………………………………………………….

매거진의 이전글 통역은 페로몬샤워젤의 향기를 타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