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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May 27. 2021

포기하는 게 아니라 보류하는 겁니다

 평소에 배우고 싶은 게 많은 편이다. 남들이 뭔가 잘하는 모습을 보면 ‘와... 잘한다’하며 감탄하고 손뼉 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곧 자연스럽게 ‘나도 한 번 배워봐야겠다’는 말로 바뀌면서 이것저것 시도하게 된다. 물론 그중 상당수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은 끝내 도전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영어회화다. 부끄럽게도 난 영어를 잘 못한다. 내 평생 수십 년째 못 넘고 있는 가장 높은 벽이다. 치열한 대학입시를 거치고, 취업시장에서 토익 전쟁까지 치르며 영어 공부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어쩌다 원어민을 만나기라도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뇌 속 깊이 수십 년 동안 쌓아놓은 문법책들 속에서 흐릿한 문장들을 끄집어내 떠듬떠듬 입 밖으로 내뱉어 보지만 상대가 “What?”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진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다.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라고 자조해보지만 그래 봤자 핑계 아니겠나.

 영어치에서 탈피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시도도 여러 번 해봤다. 한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에 영어회화 학원을 다녀보기도 했고, 미국 드라마를 반복해서 들으며 받아 적어 보기도 했으며, 어디를 가든 꼭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니기도 했다. 한때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원어민을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도 해보았지만 내 영어회화 실력은 언제나 제 자리, 눈에 띄는 발전이 없었다. 그렇게 별 성과가 나오지 않는 도전은 매번 일에 치이고 일상의 피로에 젖으면서 점점 멀어지고, 끝내는 손을 놓는 결말로 이어지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 있다.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야. 잠시 보류하는 거야.”


 몇 년 전부터 영어의 자리는 일본어로 대체되었다. 요즘 자기 전에 30분이나 한 시간씩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초부터 시작한 것만 벌써 네 번째이다. 책장에는 서로 다른 기초 일본어 책이 네 권이나 꽂혀있다. 그걸 본 한 친구는 내 취미가 ‘일본어 회화’가 아니라, ‘일본어 회화 책 모으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하기도 했다. 변명을 하자면 그 책들이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 끝까지 공부를 마쳤다. 하지만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한 번 손을 놓기 시작하면 그대로 몇 달이 지나가고, 그런 뒤에 다시 책을 펴면 전에 공부했던 것들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걸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매번 손을 놓을 때마다 나는 나만의 주문을 외운다.


“이건 잠시 보류하는 것일 뿐이야.”


 몇 달 전부터는 전혀 새로운 장르에 도전을 했다. ‘글씨 쓰기’이다. 이것 역시 내가 수십 년째 넘지 못하고 있는 벽인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초딩 글씨’라는 놀림을 받고 있는 나는 첫 책인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의 출간 날짜가 다가오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책이 나오면 분명 책에 저자 사인을 해야 할 텐데, 에세이집에 초딩글씨라니 너무 안 어울리지 않은가. 고민 끝에 서점에서 글씨 연습 책을 사 와 매일 자기 전에 한두 시간씩 글씨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두세 달을 해봤더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직장을 다니는 나로서는 자기 전의 그 한두 시간이 책도 읽고 글도 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매일 글씨 연습만 하고 있으니 책도 전혀 못 읽고 글도 전혀 못 쓰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에게 우선순위는 ‘독서’와 ‘글쓰기’인데, 이게 뒷전으로 밀리니 또 다른 불안감이 밀려왔다. 글씨가 바뀌려면 최소 6개월은 그렇게 매일 연습을 해야 한다는데 그 시간 동안 계속 독서와 글쓰기를 미뤄둘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난 이것도 ‘보류’했다. 

포기가 아니야... 보류일 뿐이야

 이렇게 보류하는 것들이 늘어나다 보니 책장에는 갖가지 종류의 학습 서적들이 쌓여가고 있다. ‘나도 웹툰을 그리고 싶다’며 샀다가 1년째 대기 중인 ‘일러스트’ 책,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몇 년 전에 샀다가 그대로 색이 바래버린 ‘피아노 교본’, 건강에 좋다는 얘기에 매일 해보겠다며 산 ‘뜸뜨기’ 책 등 장르를 넘나드는 각종 학습 책들이 ‘대체 이놈의 보류는 언제 끝나는 거냐’며 원망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끝을 보지 못한 채 이것저것 찔러만 보는 나를 보면 누군가는 “끈기가 없다”, “시간 낭비만 하고 있다”라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책장에 쌓여가는 보류의 흔적들을 보는 것이 괴롭지 않다. 여전히 진심으로 그것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하지 못하는 것일 뿐, 분명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다시 도전에 나설 것이라고 믿는다. 그 책들이 나에게는 일종의 ‘버킷리스트’인 셈이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어 책장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무한한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꼭 끝을 봐야만 맛이 아니다. 오히려 첫맛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클 때도 있다.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 하여 얻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이룬 순간 느끼는 큰 기쁨 못지않게, 도전하는 긴 시간 동안 누리는 잔잔한 즐거움도 크다. 설사 지금 당장 도전에 나서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 소망이 있는 한 포기라는 건 없다. 그렇기에 난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보류를 해본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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