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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Jul 24. 2022

완고했던 대표의 마음을 돌린 한 마디

 몇 달 전부터 보도국 사회팀에서 데스크를 맡고 있다. 데스크는 팀장을 도와 취재 현장에서 기자들이 보내오는 다양한 기사들을 확인하고 수정해, 문제없이 노출되도록 하는 사람이다. 데스크가 해야 하는 일 중 매우 곤혹스러운 임무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팀 기자들이 뜻하지 않게 휘말리게 된 보도 관련 분쟁에 기자를 대신해 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직접 보도를 한 기자나, 기사를 최종적으로 출고한 팀장이 아닌, 데스크가 분쟁에 나가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나가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분쟁을 제기한 사람으로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와야 하니, 때로는 사실과 다른 무리한 주장을 하거나, 감정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고, 해당 기사를 쓴 기자를 노골적으로 비하하거나, 모욕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공익을 위해 진심을 다해 취재했던 기자가 면전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얼마나 분하고 억울할까. 그나마 해당 기자도, 팀장도 아닌 데스크는 책임에서 반 발짝 정도는 떨어져 있으니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중재에 참석할 때마다 겪게 되는 스트레스는 적지 않다. 차라리 내 일이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내가 책임지면 그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배 기자의 일이다 보니 보통 부담이 되는 게 아니다. 자칫 내가 잘못 대응해서 현장에서 고생한 기자의 노고에 누를 끼치게 되거나,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더구나 그 자리에서 잘 합의가 되지 않으면 상당수가 소송으로 가는데, 보도에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소송이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해당 기자가 일일이 대응하고 법정에 출석하면서 겪어야 할 고충은 클 수밖에 없다. 데스크로서는 가급적 후배 기자가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원만한 합의에 이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분쟁이 갖고 있는 성격상 정반대 입장에 서있는 상대가 있다 보니 합의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 겪었던 분쟁은 그중 매우 인상적인 건이었다. 한 업체의 젊은 직원들이 휴일마다 업무 외의 잡일을 제대로 수당도 받지 못한 채 감당해야 했던 ‘직장 갑질’ 실태를 보도한 기사였는데, 중년의 업체 대표가 분쟁을 걸어왔다. ‘그게 왜 갑질이냐’는 것이었다. 해당 업체에서 벌어진 일은 법적으로 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갑질이었고, 이에 대한 관계자 증언과 사진, 문서 등 관련 자료도 다 확보돼 있는 상태였는데도 대표는 완강했다. 허위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며 정정보도와 반론보도, 손해배상까지 요구하며 기사를 쓴 기자와 회사 측에 민사소송과 형사소송까지 걸겠다고 나섰다.


 중재 당일, 변호사도 없이 혼자 나온 대표는 억울하다며 열변을 토해냈다. 직원들이 한 일은 매우 사소한 것이었고, 예전부터 다 해왔지만 누구도 군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대표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고, 기자와 제보자를 향한 비난의 강도도 거세졌다. 우리가 왜 이 보도를 했는지 이유나 의도를 설명할 틈이 없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위원들도 왜 대표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는지 조목조목 지적을 해줬지만 대표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표의 흥분이 가시지 않으면서 평소보다 중재 시간은 두 배 이상 길어졌고. 합의의 가능성은 점점 가물가물해져갔다. 이번 건은 어쩔 수가 없겠다. 결국 소송으로 가나보다. 반쯤 포기하고 있을 무렵, 그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중년의 여성 위원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당신과 같은 세대인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그랬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요즘 세대는 우리와 다르더군요. 우리가 당연하게 감내했던 것들이 그들에게는 부당한 것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차분히 이어지는 위원의 말에, 그때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대표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대표가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위원님. 요즘 세대는 우리 때랑 다르긴 다르더군요. 젊은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결국 그날의 중재는 내가 갔던 어느 분쟁보다 좋은 방향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대표는 위원들이 제시한 합의안에 동의하고, 이 보도와 관련해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소송도 진행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한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토록 완고했던 대표의 마음을 돌린 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적이 아닌, 공감의 한 마디였다. 같은 세대로서 당신을 이해한다는 위원의 말은 자신의 입장에서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을 그의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주었고, 다른 세대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해 주었다. 공감이 또 다른 공감을 부른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때 제일 쉬우면서도 좋지 않은 방법이 그냥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그렇게 피하기에 앞서 한 번쯤 그 사람에게 공감의 말 한마디 던져 봐도 괜찮지 않을까. 혹시 또 모르지 않나. 나의 작은 공감이 큰 공감으로 되돌아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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