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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iin Feb 19. 2024

석사는 한국에서 하는 게 어때?

그때는 말하지 않았던 것들. 떠나려 할 때 느끼는 것들.

석사유학을 준비한다고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래도 석사는 한국에서 하는 게 어때?" 이런저런 근거들이 그 뒤를 따라붙었지만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네 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 있는 줄은 마련해 둬야지. (해외 석사가 해외 박사를 염두에 두고 떠난다는 짐작에서 나오는 우려)

언어가 큰 벽이 될 텐데 여기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어? (초대 효용 최대 효과를 고려하는 실용적 우려)

  (이 두 근심에 대한 회고는 기회가 되면 다시 풀어보고 싶다.)


사회생활과는 담을 쌓고 산 탓에 대체로 내 인맥은 여전히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거나 한때 공부에 뜻을 두었던 사람들이다. 모두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때도 알았고, 지금도 물론 알고 있다. 특히 학문을 업으로 삼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맷집을 단단히 키워두어야 한다. 여전히 학교로 돌아갈 고민을 하는 나는 문득 돈도 안 되는 학위를 손에 쥐고 거리에 나앉는 상상을 한다. 아주 없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의 친애하는 지인들이 입을 모아 하던 조언은 감정에 치우지지 말고 융통성을 좀 발휘해 보라는 거였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게 죽어도 싫은 나는 늘 "하하. 그러게요." 하며 어물쩍 대화를 마무리하곤 했다. 나를 얼추 아는 사람들은 허허 웃는 내가 생각 없이 머리에 꽃밭을 채운 어린애인 줄 알았겠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조언을 새겨들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 나라가 아닌 곳에서"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어 따라오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분명히 하건대 나는 이 글을 쓰며 한국사회를 폄하하거나 부정할 마음이 전혀 없다. 한 사회는 그 사회가 살아남기에 가장 최적화된 방향으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특한 행위, 예술, 사회, 정치, 경제 등 잡다한 꾸러미의 양상들이 문화를 이룬다. 그러니 나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좋고 나쁜 문화가 있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생의 최악의 조건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 비싼 학비를 들여가며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함부로 속단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고, 네가 엄마한테 잘해야지."


열세 살을 코앞에 둔 겨울에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아빠가 사라졌다. 영영. 우리는 아침 일찍 잘 다녀오자고 인사했고 한쪽은 그 약속을 허망하게 져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는 이제 부모님 인적사항을 적을 때 겪는 피할 수 없는 불편함에 익숙해져야 했다. 선택한 적 없는 삶의 조건에 노출되었고, 그에 따라붙는 시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내 가족사를 우연히라도 알게 된 이들은 예기치 않게 봉변을 당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난 불편한  대화상대는 되고 싶지 않아 우리 집의 일은 우리의 사사로운 사건으로 껴안고 삼키는 훈련을 했다.


그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으니 한국사회는 여전히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가 당연시되던 사회였다. 우리 엄마는 졸지에 남편 잡아먹은 귀신이 되었고, 나와 내 동생은 숨 쉬는 것도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요청한 적 없는 오지랖을 쏟아붓는데 맥도 못 추며 우리는 맨 몸으로 그 모든 억울한 동정을 받아내고 있었다.


뒤를 이어 따라온 포화는 "(아빠도 없는데) 엄마가 너희 둘 키우는 게 얼마나 대단하니. 너희는 꼭 엄마한테 효도해라"였다. 이런 입으로 싸는 똥은 정말이지 노땡큐였다. 나는 이미 착한 아이병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K장녀고, 혹여나 엄마가 무너질까 언제나 노심초사였다. 어린 나는 엄마도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우리가 고아가 된다면 어디로 가게 될까 시키지도 않은 걱정을 하며 스스로를 달달 볶았더랬다. 그런데 혈육도 아닌 인간들이 내게 효도까지 강요하다니.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를 근심하는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리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은 딸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낸 딸은 성인이 되면 죄의식에 빠진다. 나는 이 사회가 주입하고 내가 내면화한 모녀의 세계라는 굴레에서 지독하게도 벗어나고 싶었다.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엄마를 연민하지 않고 각자의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엄마의 다정한 친구이고 싶었다. 우리에게는 거리가 필요했다.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가장 큰 이유는 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나의 앞날은 물론 오늘 내가 내놓는 말의 수준까지 제멋대로 평가받게 만드는 세상.


나는 어디를 비추어보아도 "차세대 리더"나 "지도층"과는 거리가 아주 먼 변방의 인간이다. 경기도 촌구석에서 작은 도자기 공장을 하던 내 부모는 사업수완은 그리 좋지 않았고 마음씨는 지나치게 좋았다. 그들은 언제나 "남에게 줄 때는 아쉽지 않게 주고, 주고난 뒤에 돌려받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라고 가르쳤다. 덕분에 나는 움켜쥘 줄 모르는 칠푼이가 되었다. 한 번은 아빠가 도예공들을 만나러 일본에 다녀오며 사다 주신 웨딩피치 인형을 다 헐어 삐걱대는 바비인형과 바꾼 적이 있다. 좋은 것을 양보한 나는 뿌듯하게 누더기 바비를 흔들어 보였다. 속이 상한 엄마는 나를 보며 "제 몫도 챙길 줄 모르는 바보"라 했다. 나는 그때부터 확실히 내 몫을 낚아 채기 시작했다. 승냥이처럼. 흔히 말하는 모범생 (좋게 말해 모범생이지만 사실 내가 쓰고 싶은 표현은 Teacher's pet이다.)이 되었고, 시골 학교에서 조금 빼어난 덕에 운 좋게 서울 중상위권 대학에도 입학했다. 문제는 여기서도 터진다.


내 동기들은 30명 남짓 되었는데, 그중 꼬리표를 제일 많이 단 건 나였다. 한부모 가정. 시골출신. 기간제교사 엄마. 왜 우리가 열심히 살아낸 흔적은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지. 나는 늘 내가 이물질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부유하는 불순물. 내가 대학에서 만난 인간들은 대체로 온전한 부와 모가 전문직 혹은 전문직에 버금가는 직업을 발판으로 꽤 안정적으로 두 자녀를 양육하면서도 허덕이지 않는 부류였다. 소위 말하는 이상적인 중산층 (영국적 개념으로 치자면 Upper Middle Class)* 이 바글바글한 곳이 바로 마주한 대학의 현실이었다. 물론 가족마다 개인사는 있겠으나 이 중산층이라는 거품은 모두가 이상적인 삶을 산다는 환상으로 연명하니 잠시 비판가적 시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이들은 비슷한 배경을 가진 덕에 이야기가 쉽게 통하고, 부모가 제공한 초기 경험이 풍부한 덕에 아는 것도 많다. 그들은 참 해맑고 쉽게도 산다. 그늘이 없고 짠내를 풍기지도 않는다. 나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내가 불편한 쪽을 택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단단히 상하게 한 것은 그렇다고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들이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들도 아니라는 점이다. 예기치 않은 질문을 해 교수를 당황시키는 쪽은 나였고, 글재주를 칭찬받는 것도 나였다.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기이한 모순을 포착해 보자는 것이다. 이 정도면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누리고 이곳에 온 애들과 문명의 귀퉁이에 살던 애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만날 때, 귀퉁이의 애가 운이 좋았던 것인가 문명의 애들이 특혜를 입은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며 그 누구도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그들의 노력이 나의 것보다 하찮은 것이라 말하고 싶지도 않고, 여전히 나는 내 어린 날을 편견 없이 따뜻하게 감싸준 친구들을 하염없이 사랑한다. 이 소제목을 쓰며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아무리 고쳐보아도 그들에게 칼을 겨누는 내 모습을 지울 수 없다. 나의 선하기만 한 친구들은 분명 자신을 탓할 것이나 이것은 우리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건 너와 내가 이런 굴레에 엮여 만나도록 만든 악랄한 시스템 탓이다. 샐리 루니의 소설 <노멀피플>의 두 주인공 매리앤과 코넬처럼. 우리는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주어진 조건에 가로막혀 번번이 한숨을 삼키고 마는 애절한 관계에 가깝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비수를 꽂았을지 모르겠다. 부디 본인이 아닌 나를 미워하시라. 나는 속으로 다분히 나의 사랑스러운 벗들을 원망했다 미워했다 질투했으니 미움받아 마땅하다.


예기치 않게 나는 저들의 삶에 끼어들었다. 서로를 좋아하게 된 이상 나는 이 껄끄러운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한다. 나와, 내가 속한 부류의 사람들 그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느끼는 일이 버거워서, 그래서 떠나고 싶었다. 내가 나고 자란 배경이 나를 재단하는 그 불공평한 처사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삶이 싫어서.



"이제 와서 웬 맑스고 정치경제학?"


해외 대학원에 지원하고 싶다는 언질을 띄웠을 때 A 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다. 황당했다. 물론 결국 전공을 선회해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진작에 수포자의 숙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경제를 전공해 보겠다는 것은 굉장한 무리수였다. 그럼에도 정치경제학은 내게 매우 시의적절한 학문이었다.


세상은 점점 더 불공평해진다. 최근 가디언지의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세계 빈부격차는 극악무도하게 벌어져 전 세계 인구의 1%가 생산된 부의 90%를 훌쩍 넘는 비율을 독식했다. 부유한 1%는 대체로 백인 남성이다.


영국의 국가 운영자 다수는 대대손손 물려받은 작위와 영지가 있다. 이튼스쿨, 옥스퍼드로 이어지는 엘리트코스를 거쳐 대중들은 쉽게 만져보지도 못할 부를 누리며 노동자계급을 업신여긴다. 그들은 금융, 기술 자본가들과 결탁해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만든다. 이보다 적나라하게 2017년의 내가 옳았노라고 말해주는 지표가 있을까. 그날의 교수는 말을 채 끝맺지도 않은 나를 야멸차게 몰아세우며 눈을 흘겼다. A 교수가 고리타분하다고 했던 학문은 이곳에 오고 보니 젊은 빨갱이들이 줄을 서서 배우려 안달이었다.


나의 학문적 센스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교수, 혹은 한국사회에서 내가 만난 연장자들이 젊은 세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아직 어리고 생각의 매듭이 거칠다. 이것밖에 못 배웠으니 이만큼 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연장자의 몫은 마무리가 성긴 구석을 찾아 야무지게 기워갈 수 있는 연장을 쥐어주는 일이다. 분명 A 교수는 제게도 어려운 학문을 고작 학부를 간신히 마친 20대 중반 나부랭이가 떠들어대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을 거다. 찍어 누르고 싶었겠지.


학부를 쉬어 쉬어 가느라 6년이나 보낸 나의 모교는 여전히 그리운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참스승도 만났다. 그러므로 교수집단을 싸잡아 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성숙한 어른을 길러내는 일에 서투르다는 점만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이의 패기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너무 많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 "넌 어려서 아직 몰라, " "건방지게." 건방지고 무례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 깔고 보니 건방진 어른들이 내 꿈을 하나씩 꺾고 있었다. 아주 건방지고 무례하게 제 멋대로. "어린년이 나댄다며." 사나운 어른들은 그리도 나를 작아지게 했다.


무엇보다 학계에서의 이런 문화는 최악인데, 후배 학자를 동등한 연구자로 대하는 것이 아닌 교화의 대상이라거나 심부름꾼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을 스승 삼아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싶었다. 제 멋대로 나를 판단하고 귀 담아 듣지 않으면서 단박에 어린 계집의 잡소리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험상궂은 이 나라의 지성이란 작자들의 성미가 싫어서. 나는 내가 내어 놓는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줄 곳으로 가고 싶었다. (물론 이 또한 환상이었음을 곧 밝히겠지만.)



나는 효도강요, 아부지라는 스펙, 어린년의 싸가지라는 시련 앞에 최대한 조신하게 버티려다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세상에서는 어떤 꿈도 꾸고 싶지 않고, 무엇도 이루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조언을 뿌리치고 도박 같은 석사유학을 떠난 것은 그 때문이다. 상황적 조건이 불편하더라도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잠시 내 모든 불안과 고뇌의 진앙지를 벗어나 최대한 빨리 혼자가 되고 싶어서. 나를 이리도 쥐고 흔드는 (나의) 한국이 싫어서.



슬퍼지려 하기 전에


석사를 마치고 잠시 귀국했을 때 나는 내게 추천서를 써준 전공교수에게 가지 않았다. 대신 허기진 20대 초반의 나와 친구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가던 선생님께 갔다. 가장 먼저 K 선생께 내가 척척 석사가 되어 돌아왔노라고,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어떻게 살아내기는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 말하는 내게 K 선생은 옅은 한숨을 뱉은 뒤 말했다. 그는 박사를 하려면 석사를 한 김에 바로 하는 것이 좋다는 둥 이러쿵저러쿵 조언을 하는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네가 계속 공부를 하겠다니까 말해줄게. 박사가 된다고 해서 네게 보장될 자리는 없어. 그래도 계속하고 싶다면 하는 거야. 힘들 거라는 것만 알아.


K 선생이 젊어 탐닉하던 주제를 연구하고 싶다는 말을 듣자 그는 소년같이 눈을 반짝였다. 연구실 책꽂이를 한참 뒤적이더니 내게 지침서가 될 만한 원로 학자들의 책을 양손이 무겁도록 들려주었다. 나는 힘들어도 괜찮다. 사실 주로 힘들고 가끔 행복하기 때문에 아주 힘들어도 종종 행복하다면 할 수 있다. 아주 가끔 이런 어른들이 나를 다독인다. 모국어로 위로를 주는 어른이 있는 것은 감동이다.




*굳이 Upper Middle Class를 언급한 이유는 이렇다. 나는 스스로 한국사회의 중산층 임을 부정할 수 없다. 중산층이라는 피상적 계급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 봤을 때 나는 경제적 여유가 조금 부족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누가 뭐래도 중산층 가정의 문화적, 사회적 여유를 누리며 자랐다. 내 부모는 모두 예술을 전공했고, 두 사람 모두 대학원 공부를 마친 사람들이다. 우리 부모는 가난했지만 가르치는 일에는 아끼지 않았고, 방문을 닫고 한숨을 쉴지언정 나와 내 동생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중산층이라는 두루뭉술한 개념은 이 때문에 상부에 있는 자들과 하부에 있는 자들의 삶의 경험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다. 반면 Upper Middle Class라는 개념은 여전히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 영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해 귀족은 아니면서도 귀족에 버금가는 문화와 여유를 향유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특정 직업군의 의미까지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나는 Upper Middle Class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느끼던 이물감의 이유를 알았다. 내가 그들과 우연히 특정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게 된 이유로 그들에게 기대되는 행동양식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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