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몰포스 Nov 06. 2023

아직, 돋보기는 끼지 않기로 했다.

호수로 떠난 여자, 13편



그 날 오후, 호수마을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영화관에서 어두운 극장 안을 더듬거리고 있었던 건 표에 적힌 내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티켓에 적힌 ‘6열-11번’ 좌석이 아무래도 찾아지지 않았다. 어두워서 그런가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봐도 마찬가지였다. 부릅뜬다고 해봐야 눈이 침침해진지가 여러 달이니, 애를 쓴다는 말이 더 맞겠다. 지방도시에 평일 오후에 예술영화관 관객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다. 빈자리 아무데나 앉으면 되었지만 그래도 찾고 싶었다. 찾아지지 않아 끝내 찾고만 싶었다. 영화관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표를 보는 게 무리인가 싶어, 출입구로 더듬더듬 걸었다. 안내도를 보거나 직원에게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관객이라곤 나 하나뿐이어서 바쁠 일도 없는데 젊은 여직원은 성실해 뵈지 않았다. 

표를 살 때도 내 시선을 바로 보지도 않았고 상냥한 말투도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실망스러웠던건 그녀가 부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영화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을, 영화광들을 맞이한다 게 꽤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월급도 받고. 쥐가 치즈공장에 일하고 싶어한다면 그런 심정이리라. 과거 내가 가지지 못한 자리를 불성실한 자세로 차지한 것에 괜한 질투가 일기까지 했다. 이십오년전 희망사항인데 말이다. 질척거리는 미련도 갱년기 증상인가 하면서 영화관 로비에 나갔다.  


아마도 저 불성실해 뵈는 직원이 표를 잘못 줬으리라. 

단호하게 이 표에 적힌 자리는 없노라고 한 마디 할 작정이었다. 환한 복도로 나와 직원을 향해 걷던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표를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영화관 로비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오후 햇살에 표가 확연히 보였고, 표에는 숫자 6이 아니라 알파벳 G가 인쇄돼 있었다. 글자가 생물이어서 변신이라도 한 것처럼 미세한 현기증이 일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직원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 했으니까. 나는 돌아서서 표를 들고 다시 극장 안으로 돌아와 G열 11번 자리를 쉽게 찾았다. 객석 가운데 줄 가운데 자리였다!


이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은 정지되고 음성만 나왔다. 일 분, 이 분...이 지나도록 그대로였다. 역시 직원은 영화가 어떻게 상영되는지도 지켜보고 있지 않은 게 확실했다. 기다리다가 안돼서 극장을 나와 로비 매표소에 앉은 여직원에게 말했다. 영상이 멈췄고 소리만 나온다고. 그러자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아! 하고 놀란 여자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역시 또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다. 곧 영화는 다시 상영되었지만 흥미는 잃었다. 보는 둥 마눈 둥하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극장을 나왔다. 



발길이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호수마을에서 시내에 나온 김에, 책도 빌리고 읽고 프린트도 하고...도서관은 집을 떠나 호수마을에 사는 이방인에게 정거장이자 서가였다.  


“필요하시면 누구든지 쓰세요.” 


도서관 서가에서 내 눈길이 멈춘 곳은 돋보기를 마련해 둔 책상이었다. 

평소라면 무심하게 지나쳤을 곳이었다. 50대, 60대,70대 별로 끈 달린 돋보기가 비치돼 있었다. 하나씩 써보았다. 그리고 책을 펼쳐 봤다. 50대용 돋보기안경을 쓰자 글자가 또렷하게 잘 보였다. 글자가 친절하게도 크게 잘 보였다. 눈이 시리지도 않았다. 눈과 책 사이에 이전에 없었던 기기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라니. 


돋보기를 놓고 내 시선과 발길이 저절로 큰 글씨 책 코너로 슬며시 옮겨졌다.  

이 코너 역시 나와는 먼 세계라고 지나쳐 왔던 곳이었다. 나만 그런가,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아아, 저기 멀리 작은 새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간다 싶었는데 허연 비닐봉지였다. 갈색의 작은 새라고 생각했는데 나뭇잎이었다. 문득, 큰글씨 서가에서 그런 일들이 떠올랐다. 시력이 좋을 땐 사실만 보였지만 흐릿해지니 상상도 보는 것이라면 이것도 나쁘진 않다. 책 읽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아 큰 글씨 책을 빌렸다. 크고 무거웠다. 


2019년 7월 8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제목은 “눈을 감고 글을 써라” 였다.

프랭크 브루니가 조엘 버켓이라는 신인작가의 데뷔 소설을 평한 기사였다. 그가 신인작가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위대한 문학의 기능은, 감춰져 있던 것을 드러내 주거나 어둠 속에 있던 진리를 밝혀주는 일이라고. 작가, 조엘 버켓은 시력을 읽으면서 능력을 발산하고,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었고, <들짐승들이 모두 마시고, Drink to Every Beast > 라는 환상적인 스릴러물을 썼다. 작가 스스로도 시력을 잃은 작가의 대열에 합류한 것에 만족했다.  


남미작가이자 환상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시력을 상실해 눈이 멀어지는 것에 대해 <눈 먼 이를 향한 예찬론>을 썼다. ‘작은 새의 비상’이나 ‘황금빛 달’을 줄기지는 못하지만, 대신 시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에세이를 통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작품을 쓰는 소재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굴욕이든, 민망함이든, 불행이든 그렇다. 만약 눈 먼 작가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에게 눈이 먼 것은 소중한 선물이다.”라고 했다.



호수가 방으로 돌아와 큰글씨 책을 보노라니, 다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크기가 크고 글자도 컸던 그림책을 읽는 아이 말이다. 닥쳐 온 노안과 아직 오지 않은 혜안 사이에서 방황중인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착각이나 상상도 보는지도 모른다. 우리 몸에서 가장 취약한 장기라는 눈, 눈에서부터 내 중년에 신호는 시작되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나는 내가 중년, 노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핸드폰이든 노트북이든 하릴없이 영상을 보던 일이 줄어들었다.

쇠잔해져가는 내 눈도 소중하니까. 내 눈은 내가 청춘에서 중년에 이르렀듯이 그만의 여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내 눈은 젊고 건강한 줄 모르고 보이는 것, 안 봐도 될 것들을 무던히도 보아왔다. 중년이 되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좀 더 멀리보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유를 가지라고 시간과 몸이 선사하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보일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라도 보라고...노안의 계절이 온다면 더불어 나는 혜안의 계절로 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옛 가수, 이상은의 노래 구절을 절로 부르게 된다. 


‘젊은 날엔 젊음이 보이지 않았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내가 잃어가는 것을 인식하면서 곧 다가올 것들을 가만히 기다린다. 

서서히 쇠약해져 가는 감각에 고별하고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자. 호수 곁에서라면 그런 기다림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고 글을 쓰라는 먼 나라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지는 밤이다. 적막하여 눈이라도 내렸으면 기다려지는 한겨울, 호수에서의 혼자 견디는 밤이다. 낮이 아닌 밤이어서, 차라리 어둠속이라서 낮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어색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하얀 눈도 그려지고 그 눈 속에서 사박사박 걷는 한 여자도 그려진다. 




<오늘의 필사>


“넌 인간으로 태어난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몹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럼, 끝없이 펼쳐지는 깊은 바다속 눈이 보이지 않는 거북이가 살고 있는데 그 거북은 백년에 한번씩 바다위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드넓은 바다에 통나무 한 개가 바람이 부는 대로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다. 그 통나무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백년에 한 번 수면 위로 올라오는 눈먼 거북이가 파도에 휩쓸리며 물 위를 표류하는 통나무 구멍에 머리를 넣을 확률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석가님, 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수억년 수십억년 아니 수조년에 한번은 일어날지 모르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난아,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은, 이 눈 먼 거북이 통나무 구멍에 목을 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있기 어려운 고마운 일이다.”  


“눈 먼 거북이 물에 뜬 나무를 만났다.” 라는 뜻의 '맹귀부목' 은  부처님과 아난의 위와 같은 문답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바야흐로 꼴부리가 제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