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나무 May 30. 2024

오늘도 나는 산에 오른다.

용문산 산행기

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무거운 몸은 더 누워 있고자 하나 반사적으로 의식이 돌아온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주말에 일하느라 바깥에 나가 식사할 시간이 없는 남편을 위한 도시락이나 간식을 준비한다. 오늘 산행에서 먹을 약간의 간식과 물병은 따로 챙긴다.      

  산악회 버스에 오르자마자 안대를 하고 눈을 감는다. 버스에 앉아서 자는 게 불편하고, 쉽게 잠들지도 못하지만 조금이나마 피로를 풀기 위해서다. 오늘 산행지는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다. 용문사나 용문사 앞 1100년 된 은행나무가 유명하다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용문산은 어려운 구간이 많아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었을 뿐,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출발했다.      

  오늘의 들머리 설매재 휴양림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다. 5월 하순, 봄의 끝자락이다. 오르락내리락 변화무쌍한 날씨다. 무더운 여름 날씨를 연상케 하는 오늘은 더위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초입부터 경사가 심하여 숨이 차오르고 온 몸에서는 열기가 퍼져서 땀이 줄줄 흐른다. 힘겹게 오르막 구간을 지나자 비교적 완만한 산책로 같은 오솔길이 이어지면서 숨결이 잔잔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이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동안 조금씩 야생화나 약초에 관해 공부한 게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풀이나 나무가 보이면 무척 반갑다. 취나물이나 단풍취도 아직 여리고 연하여 나물로 먹기에 좋아 보인다. 신장이나 피부노화 예방에 효험이 있다는 눈개승마도 군락을 이루어 어우러져 자라고 있어 눈길을 붙잡는다. 등산로 길가에는 멸가치가 무성하고 족두리풀, 벌깨덩굴, 풀솜대, 둥굴레 등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야생화들이 나름대로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작지만 강인한 아름다움을 느껴진다. 아카시나 이팝나무 등 흰색의 꽃이 대세인 5월, 용문산에도 고광나무나 쪽동백, 덜꿩나무 등 순백의 꽃들이 가는 곳 여기저기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고 있다. 병꽃나무도 한창 때라 여기 저기 곳곳에 터 잡고 새초롬하게 피어있다. 작은 풀이나 야생화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면서 들여다보고 그들과 대화하듯 지나다 보면 더운 날씨나 힘겨운 산행길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힘내세요~”

  앞에 가는 산친구의 응원에 힘입어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오르막길은 언제나 버겁고 힘들다. 간혹 평평한 오솔길 구간도 있어서 헐떡이는 숨을 고를 수 있지만 이미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여유가 없다. 다리와 무릎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스틱을 잡은 팔에 잔뜩 힘을 준다. 그럴 때의 나는 네 발 짐승이 된다. 마지막 오르막 구간에 이를 즈음엔 온 몸이 달아올라 열기에 화끈거린다. 등줄기에서는 땀이 흐르고 얼굴에는 땀이 말라붙어 버석한 소금기가 만져진다. 벌써 해가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낮이다. 시간을 확인하니 12시가 되어간다. 5월 하순이지만 농익은 여름을 실감하게 한다. 맑고 푸른 날, 바람마저도 인색할 때면 온 몸은 불기운으로 가득하다. 지칠 대로 지친 다리로 돌길이나 계단을 오르는 것은 쇳덩어리를 옮기는 것 같다.      


  “힘들지 않으면 등산이 아니죠?”

  헉헉거리며 힘들어하는 서로를 격려라도 하듯이 길동무 중 누군가 호탕하게 내뱉은 이 말에 다들 공감하는 웃음으로 화답한다. 이렇게 힘든데, 왜 이런 고행길을 사서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모처럼 쉬는 주말에 늘어지게 낮잠 자고 뒹굴거리며 TV채널을 돌려도 되고, 가족들과 수다 떨며 맛있는 것 먹어도 좋을 것이다. 그 편안함을 떨치고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내어 멀고도 높은 산에 와 있는 나를 또 다른 내가 보고 있다.      


  등산은 인생길의 축소판 같다. 순간순간이 모여 전체적인 인생이라는 퍼즐판이 완성되듯이 산행도 오직 한발 한발, 한걸음 한 걸음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묻고 내 안에서 답을 찾아가면서 휴, 깊은 한숨과 함께 헐떡이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으니 드디어 용문산 정상(가섭봉,1157m)이다. 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광경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완전한 한 폭의 동양화이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면서 능선이 굽이쳐 펼쳐진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몸으로 느꼈던 모든 고통과 힘겨움을 단숨에 잊어버리고 그 자체로 환호와 감탄만이 남는다. 가슴 깊숙이 고통을 넘어선 행복감이 밀려온다.      


  오르락내리락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 것, 까마득한 정상도 한걸음 한걸음의 결정체이듯 내 인생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을 확인하고자 오늘도 여기에 와 있다.

용문산 정상에서@여행하는나무


매거진의 이전글 뭐든 때가 있다니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