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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11. 2024

그녀가 일군 아메리칸드림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던 바로 며칠 전 뉴저지 친구가 전한 빅뉴스!

친구의 아들이 미 상원의원에 당선됐다고 한다.

이번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미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앤디 김.

1982년생, 젊은 나이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니 대단한 쾌거다.

그의 이력과 경력을 믿는 나로서는 언젠가 당연히 밟을 코스라 여겼지만 예상보다 빠른 낭보를 접하자 즉시 축하인사를 보냈다.

두 차례의 뉴저지주 하원의원에 이어 연이어 상원에 입성한 마흔둘의 한인에게 거는 기대가 점차 확대된다.

아암, 언젠가 그날이 올 수도 있고말고!


2019년 새해 벽두 뉴저지 친구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의 아들이 미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는 반가운 뉴스였다.

뉴저지에서 생활하던 2013년 가을이었다.

앤디가 백악관에 근무하며 부모를 초대해 다녀왔는데 다음 해엔 부모 친구분도 한 명 동행할 수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내심 백악관 구경할 꿈에 부풀어 있던 중 예상외로 빠르게 뉴저지 집이 팔렸다.

일사천리로 캘리포니아에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하면서 2014년은 경황없이 지나갔다.

새로운 환경의 캘리포니아라 하루하루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신선놀음에 흠씬 빠져있었다.

그러다 2018년 늦가을 한국에 다니러 왔는데 그 친구에게서 카톡 연락이 왔다.

자기도 딸내미랑 한국에 와있다며 만나자 했지만 부득이하게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당시 국적회복 첨부 서류의 하나인 시민권 증서를 가지러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바로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각으로 1월 4일, 아들이 국회에서 선서식 하는 거 보고 워싱턴에서 방금 왔다며 친구가 미국회 집무실 사진(상단) 등을 보내왔다.




우리가 친구 사이로 지내게 된 것은 그녀 남편이 가교 역할을 해준 덕이다.

교민들은 대체로 화잇칼러 직업인이 적은지라 세탁소 이용을 별로 하지 않는데 김 교수는 일주일에 한 번 양복과 와이셔츠를 맡기러 왔다.

옆집 비디오 가게 주인으로부터 다리 심히 저는 그가 필라델피아 드렉셀 대학 김 교수임을 알았다.

그랬다, 김 교수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50대의 왜소한 남자로 가게 안의 꽃나무와 음악에 따뜻이 조응했다.

얼마 후 귀부인풍의 한 미모 하는 단아한 차림을 한 한국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당신 분위기에 맞는 분이 처치 로드에서 컨트리 클린을 운영하던데 꼭 방문해 친구 삼으라"고 하여 일부러 왔노라 했다.

현직 간호사인 그녀가 퇴근길에 그렇게 가게에 들렀고 우리는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도 금세 맘이 통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휴일이면 체리힐 이웃 동네인 말튼 호숫가에 사는 그녀 집에 들러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 나누는 좋은 벗이 되었던 우리.

그때 알게 된 가정사, 남보기엔 그럴싸해 보여도 우리네 삶 오십보백보 차이로 누군들 그리 녹록할 리 있던가.




남편은 연세대에 다니던 일곱 살 연상의 삼촌 친구였다고 한다.

밀양 시골에서 그런대로 살던 그녀 집안과 달리 부모를 일찍 여읜 남편은 친척 집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천만다행 타고난 우수한 두뇌로 학교 성적은 늘 최상, 발군의 실력이 빛을 발해 장학생으로 선발되며 연대에 들어갔다.

여고생 시절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대학생이 심한 장애를 가졌다는데 어느덧 연민의 감정이 싹텄고 그게 연정으로 발전했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난리를 겪으며 연금 상태의 고초도 당한 그녀는 어찌어찌 간호대를 졸업하였다.

때마침 남자가 국비장학생으로 MIT로 유학 가는 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주저 없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녀는 가난한 유학생 뒷바라지하며 두 아이 낳아 양육하느라 낮에는 집안일, 밤에는 항상 병원에서 야간근무를 해야 했다.  

남편은 낮에는 학업에 매진하고 저녁이면  밤새 아이들 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야 하는 고단한 초기 이민자의 삶을 살아냈던 그들.


힘들지만 하나씩 일궈나가는 재미에 그리고 젊었기에 기꺼이 그들은 전력투구했다.

그녀 가족은 그렇게 뉴저지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정착할 수 있었다.

하버드에서 유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남편이 필라 대학 교수로 임용되고 그녀 역시 수간호사가 되어 비로소 안정궤도에 든 생활.

그러다 졸지에 들이닥친 풍파에 크게 시달리기도 한 그녀다.

공부밖에 모르는 남편이 주위 꼬임에 솔깃해져 유전공학 관련 사업에 집을  담보로 투자했다가 반평생 일군 정든 집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 집은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으로 거기서 어린 남매는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행복한 추억을 쌓아왔으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온 공간이었다.


네 가족의 스윗홈이자 드림하우스인 그런 집을 한순간에 잃고 만 참담스런 허망감.


남편이 그럴 수없이 미워진 그녀에게 해준 이 한마디에 마음이 녹더라는 그녀. "하지만 그래도 자녀들에게 우수한 DNA를 물려줬잖아요."

그 후 김 교수는 한국 유전학 연구소에 재취업이 되어 십 년 가까이 부부는 미국과 한국에서 따로 지냈다.




맏이인 딸 모니카는 예일대 역사학과를 나와 현재 NYU 정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사십 대 골드미스다.

아들은 캘리포니아의 딥 스프링스 칼리지를 거쳐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후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전도 유망한 이 젊은이는 2009년 미 국무부 상원 외교위원회를 거쳐 2011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전직 중앙정보국(CIA) 국장이었던 미군 사령관의 전략 참모로 일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3년부터 2015년 초까지 백악관 NSC(국가 안보회의)의 이라크 등 중동 국가 담당 보좌관을 지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령관 전략 참모도 역임했다.

그는 2013년 수니파 무장 조직 ‘이슬람 국가(IS)’ 전문가로서 오바마 행정부의 IS 폭격과 인도주의 지원 담당 팀으로 활동했다.

자신을 키워준 사회 공동체와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게 해 준 미국과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그는 2018년 정치에 투신하였다.

그렇게 민주당 후보로 뉴저지 벌링턴 카운티에서 연방 하원 의원에 도전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그에 비해 상대는 지역구 3선에 도전하는 현역 의원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안인 ‘트럼프 케어’를 만든 거물이었다.

벌링턴 카운티라면 잔다크 성당이 위치한 지역이라 내게도 아주 낯익은 지역.

여기는 유권자 65만 명 중 백인이 85%에 달하며 한국인은 300여 명에 불과해 말하자면 동양계 소수 인종인 그에게는 험지였다.

그럼에도 2선 의원을 꺾고 한국계로는 유일한 연방 하원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하원 군사 위원회 소속으로 활약했으며 당시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하원 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해 성공했다.

"북핵은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문제다. 당파의 실리가 아니라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짚어낸 그.  


군사 위원회 소속인 그가 앞으로 북핵과 관련해 어떤 의정 활동을 펼칠 기대하는 바 크다.

어언 이십년 가까이 되는 2005년, 영국으로 출국하기 앞서 턱시도 고치려고 가게에 들렀을 때만 해도 앳되던 얼굴이었다.

사진을 보니 어느새 관록 붙은 중년의 풍모로 변한 지금.

그는 옥스퍼드 유학시절에 만난 lawyer 인 중국계 아내와 자녀 둘을 두었다.




시민권 시험을 앞두고 익힌,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며 부통령마저 유고시는?

하원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는 정도만 알았는데 상원과 하원 의원 모두 똑같이 법을 제정하는 일을 하며, 각 주의 인구비례에 따라 선출되는 하원 의원은 임기 2년이라는 걸 그때 익혔다.

미국회 의사당에서 선서식을 가진 아들 사진을 보내며 기쁜 날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는 그녀.

전부터 그녀는 남모를 고충이 있노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워낙 소년기부터 두드러졌던 영재들이라 늘 주변의 칭찬 대상이었던 자녀들이 물론 엄마는 자랑스러웠다.

그럼에도 막상 어느 경우나 최대한 몸 낮추고 겸손하게 대처해야만 했다고.

자녀들이 자랑스레 뉴스에 오르는 유명인 되어도 미국 친구들과 달리 한인 친구들에게는 축하받긴커녕 혹여 마음에 상처될까 저어 돼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고.

다만 나와 얘기할 때는 마음 놓고 자랑도 하고 마구 뻐겨봐도 흉허물이 되지 않아 좋았다던 그녀.

심리학에서 독일어로 미트프로이데 Mitfreude, 곧 함께 기뻐하기가 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꺼움을 뜻하는데. Schaden(손실, 고통)과 Freude(환희, 기쁨)의 합성어란다.

타인의 개인적 성취를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남의 고통에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고약한 심뽀가 유독 한국인에게만 두드러진 건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대체로 비교심리와 경쟁심리가 강한 한국인들은 겉으로야 호들갑스레 축하해 주긴 한다고.

하지만 영혼 없는 껍데기 말일뿐 내심 시샘과 질투심이 많은 교민들이라, 축하받을 일로 아무리 기뻐도 자랑 같아 아예 표시 내질 않았다는 그녀.

기쁨은 나누면 곱이 된다거나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곤란하다.

오히려 기쁨 나눴더니 질투가 되고 슬픔 나눴더니 약점이 되어 돌아온다지 않던가.

행복에 이르기까지의 어려운 과정은 보이지 않고 당장 누리는 영광만이 샘이 나 못 견디겠다는 심리의 저변에 깔린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증상.

부러우면 지는 거라며 별거 아닌 척, 담담한 척, 포장해가면서 진심을 감추는 주변 친구들에 진작에 질려버린 그녀다.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피 말리는 선거전과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던 개표 시의 긴박감을 전할 때 그녀는 여전 목이 메었다.

세상에 크게 쓰임 받는 아들이길 바라는 그녀에게 더 큰 영광의 시간이 기다려 줄 것이라 말하자 그녀는 오래전에 내가 해준 말이 아직도 각인되어 있노라 했다.

그렇다. 앤디 김의 장래 포부는 하원 의원을 넘어서 더, 더, 더 높은 곳에 닿아있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인 미국 대통령이 있었듯 한국인 2세가 백악관에 입성하지 말란 법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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